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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높은구름 Apr 26. 2024

산청 대원사에서

무념(無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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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짙은 구름이었다가 그 구름 속에서 쨍하게 더 짙은 햇살이 나오면 온 세상이 훨씬 더 선명해진다.


낡은 필터를 끼운 듯 온통 뿌연 미세먼지도 빗줄기들에게 씻겨흘러가면 시린 바닷물 색 하늘이 왠지 더 고맙게만 느껴진다.


그 하늘과 맞닿산도 개울도 다 자기가 가진 향기들을 색으로 흠뻑 뽐낸다.


바람소리마저 그 색들이 시리도록 또렷하게 스친다.

그래도 차갑지 않고 그저 온기 가득해서 좋다.

짧은 초봄의 벚꽃은 져버린 지 오래지만, 벚꽃색들이 흩어진 자리에 이제는 더 희고 또 더 붉은 꽃들이 제 순서에 서두름 없이 고운 자태로 앉아 제 뜻을 다하고 있다. 


늘 고맙게 또 변함없이 구름도, 햇살도, 하늘도, 바람도, 산도, 개울도, 또 꽃들도 잊지 않고 주위를 지켜 주고 있었다.

그런 고마운 것들이 늘 곁에 있어왔지만 고마운 줄 모르고 받는 것에만 익숙해져 당연한 듯 그저 받기만 했었다고 생각하니 미안하기도 하고 또 부끄러워 민망하기도 하다.


이런저런 일들로 일상에서 벗어나 생각보다 많은 시간들이 주어지니 바쁜 일상에서 하고 싶었던 것들을 해볼 수 있어 좋은 시간이 되어 주고 있다.

이런 시간들도 또 시간이 흐르면 소중한 기억으로 남을게 틀림없다.


하여 하고 싶었던 것 중 하나가 30년도 훨씬 전에 서울에서 안과를 하고 있는 친구와 대학교 1학년 첫여름방학 그때, 지리산 종주를 마치고 내려왔던 이곳 대원사 계곡이 다시 가보고 싶어 오늘 이렇게 한없이 설레는 마음으로 오게 되었다. 

대원사 계곡

사실 이 계곡에 오고 싶었던 건지, 그 친구가 보고픈 건지, 그 시절이 그리운 건지는 알지 못하지만 말이다.


그 시절, 비 온 후의 계곡물소리와 맑은 향이 너무 좋아 계곡만 보다 보니 그 당시 이름이 대원사계곡인데도 정작 대원사를 갔었는지는 기억 속에 없다.

마냥 설레고 좋은 시절이다 보니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싶지만 그래도 한 번쯤 갈 수도 있었을 텐데 도통 기억에 없는 걸 보면 가지 않은 게 맞나 보다.

그래도 비 온 뒤 시원하게 흐르던 대원사 옆 계곡물만 머릿속에 있는 걸 보니 정말 좋았던 시절은 맞다.

그리고 설레고 앳된 스무 살짜리들의 웃음만 기억에 남아 있다.

그 무겁던 텐트와 어깨를 짓누르던 덩치 큰 배낭도 여전히 힘겹게 기억되고 있지만 말이다.


방장산 대원사(方丈山 大源寺)

좋은 기억들을 간직하며 들어선 여기는 지리산에 싸여있는, 또 계곡물소리 참 좋은 방장산 대원사(方丈山 大源寺)다.


신라 진흥왕 때의 창건이야기와 조선 숙종 때 다시 지은 이야기도 나오나, 현대사의 좌우대립으로 소실되었던 적이 있는 가슴 아픈 사연도 있어 안타깝기도 하다.

현재는 비구니 참선도량(比丘尼 參禪道場)으로 그 뜻을 이어가고 있다.


그날의 지리산 대원사계곡을 처음 본 그 느낌처럼 나이 들어 혼자 올라온 대원사의 첫 느낌도 설렌다.


평일 이른 오후의 대원사는 고요하고 또 조용하다.

풍경(風磬)만이 소리 내어 바람을 깨우니, 먼 길 오느라 조금 지친 이를 미소 짓게 만든다.


연신 이곳저곳 예쁜 곳을 사진 찍다 보니, 대웅전 모퉁이 지나시는 앳된 얼굴의 비구니께서 방해 안 되게 하시느라 미안한 듯 수줍게 웃으며 급히 지나가신다.

한참을 조용히 웃음 짓게 만드신다.


예쁘다.

앞에 흐르는 계곡물처럼 예쁜 산사다.

차분하게 줄 지어 놓여 있는 작은 화분들처럼 그런 예쁜 곳이다.

있어야 할 곳에 바로 그곳에서 나름 장 예쁘고 멋진 모습으로 자리 잡고 있으니 더없이 감동적이다.


오랜만에 텅 빈 마음으로 이런저런 생각 없이, 내가 아닌 앞에 보이고, 들리고, 느껴지는 것들에게 오롯이 집중할 수 있는 고마운 시간이었다.

가끔씩 그런 텅 빈 마음으로 있을 수 있는 그런 시간이 필요함을 알지만, 그게 그렇게 쉽지 않음도 알기에 지금 여기 대원사 그늘진 작은 돌계단이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한참을 그 고마운 시간들을 고맙게 보내고 있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바쁘고 지친 어느 날이 되면 그 친구에게 전화해 좋았던 시절의  대원사 계곡을, 또 함께 한 지리산을 기억하는지 물어봐야겠다.

분명 그 시절, 지리산 어느 깊은 산사 앞 시리도록 시원했던 그 계곡이라고 하면 또렷하게 기억할 것이다.

또 그곳에서 보낸 시간보다 더 많은 이야기들을 하게 될 것이 틀림없다.


좋은 기억을 함께 하며 나이 들어가는 것도 참 좋은 것 같다.

그게 좋은 친구일거라 싶다.

그 시절에도 지리산 천왕봉은 참 힘들었었다.


그래도 그 친구랑 다시 또 그 천왕봉에 가보고 싶어지는 그런 고요한 밤이다.  


산청 대원사 다층석탑 (山淸 大源寺 多層石塔,대한민국 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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