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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높은구름 Jun 22. 2024

중환자실의 계절


계절이 흘러도 희미하게 시간의 소리만 보인다.


그렇게 잊히는 건 차가운 기계음 알람 소리뿐.

파도처럼 흔들리는 심장은 끝도 없이 헤맨다.

터질 듯 짓누르는 호흡기의 공기압도 가쁜 숨을 머금는다.

한 방울씩 의미 잃은 링거액은 말라버린 눈물보다 여리고 또 쓰리다.

부어올라 옅어진 손금은 잊어버린 기억보다 더 흐리다.

그래도 이리저리 들쳐주는 늙은 간호사의 손끝이 고맙다.

애타게 등 두들기면 욕창도 검붉은 울음을 멈춘다.

푸른 보호자복과 마스크는 보고픈 이들을 다 가린다.

콧속 줄로 들어오는 음식들은 배부른 슬픔만 짓이기고,

허무한 되새김에 혓바닥은 갈라진다.

젖은 거즈는 메마른 입술을 달랜다.

앳된 인턴선생님의 힘겨운 슬픈 눈동자에 몸을 맡긴다.


오늘도 어제처럼 옆자리 하나 또 비워진다.

무섭고 또 부럽게도.

식어버린 호흡기의 긴 침묵이 차갑다.

읊조리던 심전도도 그 자리 따라 잊힌다.

늙은 간호사의 긴 한숨이 흐릿하게 흩어지면,

무심하던 알람들도 거친 숨을 멈춘다.


이 계절이 가면 또 이 계절이다.

그리움이 흐르면 또 이 그리움이니까.


심장을 움켜쥔 차가운 기계는 체온에 데워져 일정한 비명을 새긴다.

호흡기의 날카로운 공기압이 내 한숨을 막는다.

내가 멈추면 이 기계도 쉴 수 있으려나,

이 기계가 멈추면 나도 흩어져 버리려나,

멎어버린 눈물처럼 생각마저 멎어줬으면.......


또 하루가 갔다.

또 하루가 갔나 보다.

몸속 기계들이 다시 또 시린 비명을 토한다.

기계도 쉬어야 할 텐데 말이다.


끝도 없는 계절의 소리도 투명한 링거액에 노랗게 녹아든다.

반쯤 고장 난 형광등의 징징대는 소리가 정겹다.

오늘은 이 깜박이는 소리와 지겹지 않게 대화한다.

내일이면 새 형광등이 두 눈을 짓이겨 밝은 침묵에 가두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하루가 흐른다

또 끝없는 계절은 흐르고 있다.

또 흐르고 있다.

또 흐르고 있나 보다.


언제까지

또 흐르고 있었나 보다.


나 만큼 늙어버린 강아지 보리를 다시 볼 수는 있으려나.





1995년 이 계절쯤,

새내기의사 인턴으로 중환자실(ICU)을 돌고 있을 때 적어놓은 글이네요...

의사로서 할 수 있는 게 없어 힘들기도 하고, 또 한없이 슬프기도 한 어느 지친 밤에서 새벽으로 넘어가는 그즈음 적었던 기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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