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살꾼 주의!
고등학교를 졸업한 직후였던 것 같다. 친한 친구가 처음으로 강아지를 키우게 되었다. 친구는 당시 흔한 강아지 이름이 아닌 뭔가 특별한 이름을 강아지에게 지어주고 싶어 했다.
“로미오 어때?”
“이름은 참 특별하고 좋은데 밖에서 부르기가 좀 그렇지 않아?
“그러게, 길거리에서 ‘로미오~’라고 부르면 사람들이 다 쳐다보게 생겼어.”
결국 로미오라는 이름은 쓰지 못하고 ‘천둥’이라 지었다.
30여 년 전 흐릿한 기억 속 ‘로미오’란 희한한 개이름을 소환케 한 이름이 있다.
바로 ‘로버트’란 이름이다.
그 이름은 그동안 내가 알던 모든 ‘로버트’의 이미지를 불태워버리고, 한 마리 파피용 강아지를 떠올리게 했다.
윤고은 작가의 장편 <불타는 작품>에 등장하는 이름이 바로 ‘로버트’다.
사실 윤고은 작가는 <불타는 작품>을 통해 처음으로 알게 된 작가이다. 윤고은이라는 작가도 몰랐고 그의 작품세계도 또한 전혀 모르는 상태였기 때문에 <불타는 작품>을 좀 더 낯설고 신선한 느낌으로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이 작품은 윤고은 작가가 직접 ‘로버트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소각용’ 작품이라고 말했고, 작가가 이 시대에 하고 싶은 말을 가장 많이 담아 둔 소설이라고도 했다. 그래서 작가의 이전 작품을 읽을 때는 오히려 작가가 가졌던 생각의 궤적을 역추적하는 즐거움이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들었다.
소설 속 초반에 등장한 발트만이 딸의 사건을 겪고 나서 로버트를 자기 집으로 데려간 부분을 읽을 땐 오래전에 읽었던 책의 첫 구절을 떠올리게 했다.
<아주 오래전 어느 날, 나는 우연히 나폴레옹의 막내 동생인 제롬(1784-1860)의 사진 한 장을 보았다. 1852년에 찍은 것이었다. 그때 나는, 그 이후에도 결코 지워버릴 수 없는 놀라움과 함께, “나는 지금, 황제를 직접 보았던 두 눈을 보고 있다.”라고 말했다. 때때로 나는 이 놀라움에 관해 이야기했지만, 아무도 그것에 공감하거나 이해하는 것 같지 않아 보였기 때문에(삶이란 이처럼 작은 고독의 상처들로 이루어져 있다), 나 자신도 그것을 잊어버렸다.> - 카메라 루시다, 롤랑 바르트
작품 속 사건의 진실 여부를 떠나 발트만에게 로버트의 ‘눈’은 그리고 로버트가 찍은 ‘사진’은 ‘황제 나폴레옹을 직접 보았던 제롬의 두 눈’과 같은 의미였을 것이다. 자신이 직접 보지 못한 딸의 모습을 본 두 눈을 가진 특별한 당사자, 아니 특별한 개였다.
빌의 입을 통해 나온 “나는 벌어질 모든 우연에 덫을 설치한 것입니다”라는 말은 어쩌면 작가가 작품 속 곳곳에 설치한 덫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작가가 설치한 덫이 무엇일까를 생각하면서 작가가 만든 길을 따라갔다.
작가의 길을 따라가면서 내가 떠올린 질문과 생각들을 정리해 보았다.
1. <그러니까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나와 만날 일이 없을 세계. 그러나 분명히 내게 영향을 끼치고 있을 세계. 내가 수심이 얕은 물에 사는 물고기라면 로버트 재단은 깊은 바다에 사는 심해어였다. 두 존재는 만날 확률이 적지만 간혹 바다가 뒤섞이는 일도 벌어진다.> p.34
처음에는 빌의 흔적을 찾아가면서 책을 읽었다. 어딘가에서 빌이 다시 등장하여 중요한 사건을 주도할 거라 기대를 했다. 그러나 로버트와 로버트 재단에 얽힌, 주인공 안이지의 이야기에 빠져들어 빌이 기억에서 사라질 뻔했다. 그만큼 <불타는 작품>은 글의 전개가 비현실적임에도 불구하고 실제 영화를 보는 것 같은 몰입감을 선사했다.
2. 과연 로버트는 ‘한 마리의 개’일까? 이 질문에는 중의적인 의미가 있다.
로버트는 발트만과 대니라는 인물에 의해 창조된, 그들이 원하는 이미지가 덧입혀진 단순한 '한 마리의 개'일 뿐인가? 글을 읽다 보면 로버트라는 개가 실은 평범한 개보다 좀 더 지능이 뛰어날 뿐 예술을 감상하고 평가할 수 있는 개는 아닌데, 발트만과 그의 직원 대니에 의해 만들어진 이미지가 덧씌워진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헛갈리는 부분이 자주 등장한다. 로버트는 다른 개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오히려 인간보다도 더 뛰어난 예술적 심미안을 가진 개였다. 발트만 사후, 로버트도 늙으면서 로버트의 능력을 대역할 여러 훈련된 개들이 등장한다. ‘로버트’는 최초 <캐니언의 로버트>의 실재했던 로버트와 그 로버트 역할을 대역하는 여러 마리의 가짜 로버트의 합인가?
<진실이요? 잘 보관하지 못해 부패해 버린다면 다 의미 없는 이야기죠. 때로는 알맹이가 아니라 껍데기가 중요할 수도 있다는 얘기입니다. 로버트 재단의 액자 틀리 있으면 그 안에 있는 것 모두 믿고 싶은 얘기가 되지요. 그게 썩지 않는 진실입니다.> 312쪽
<첫 번째 상어, 첫 번째 금붕어만 진짜라고 생각하십니까? 그 이후는요? 더 중요한 건 메시지가 지속되고 있다는 겁니다. 로버트도 다르지 않아요.
......
다른 개체라는 말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로버트는 연속적인 세계인데, 늙은 로버트 대신 새 로버트가 등장했다고 로버트의 전체 의미가 바뀌지는 않습니다. 미래를 위해서 우리는 로버트를 계속 유지할 테니까.> p.313
3. 주인공 안이지는 미술학원 선생님과 라이더라는 삶을 살고 있지만 예술가로서 예술가 본연의 일을 할 수 있는 미래를 꿈꾼다. 그리고 로버트 재단의 후원을 받게 되면서 완벽한 창작 환경을 갖게 된다.
예술이라는 것이 경제적 여건이 뒷받침되지 못하면 예술 활동 자체의 존립을 위협받는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수많은 예술가들이 기본적인 생계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러니 누구나 경제적인 문제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예술 창작의 환경을 꿈꾼다.
아무 걱정 없는 완벽한 창작 환경이 주어진다면, 예술가는 이전보다 더 훌륭한 창작 활동을 할 수 있을까?
4. 윤고은 작가는 완벽할 정도로 평화롭고 안전해 보이는 로버트 재단 내부와, 기후위기와 재난에 처한 로버트 재단 외부 세계를 매우 극명하게 대조한다.
사회가 처한 여러 재난과 문제를 외면한 채, 순수하게 예술가 자신의 내적 욕구만으로 창작한 예술작품은 과연 가치가 있을까? 외부 사회로부터 전혀 영향받지 않는 예술 작품이라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 작품은 사회 안에서 관객과의 소통을 통해 가치를 얻는데, 그런 사회를 차단하고 작가에게 창작을 하도록 하는 것은 모순이 아닐까?
<그러나 45도가 넘는 폭염 속에서도 내 몸을 로버트 재단 안으로 들여놓으면 전혀 다른 계절이 펼쳐졌다. 최적의 온습도를 내내 유지했다는 말이다. 너무 뜨겁고 건조하지 않게, 마치 열대로 온 한 대식물을 보호하기 위한 유리온실처럼. 근교의 인공 호수는 말랐지만 재단 내부의 연못은 마를 틈이 없이 늘 싱그러웠다. 연못을 가로지르는 징검다리 위로 올라가 보았다.
...
로버트 재단의 거대한 마당은 쾌적했다. 건축 설계 때부터 빛과 그늘을 잘 계산한 덕분이기도 했지만, 이 거대한 면적이 모두 차양막 아래에 있는 건 아니었으니 실외 공간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별도의 에너지가 들어가야 했다. > p.166
<로스앤젤레스에서는 모두가 산불의 이동 경로를 주시하고 있었는데, 로버트 재단에 온 후 산불 관련 뉴스와 아예 차단된 느낌이었다. 로버트 재단에서 나를 제때 픽업하지 못한 이유가 그 산불 때문이었는데, 그런 것치고는 모두가 산불에 큰 관심이 없었다. 이곳은 다른 세계 같았다. 나와 마주치면 로버트는 “참 좋은 날들입니다. 그렇죠? 하고 인사했다> p.176
소설 속 안이지는 로버트 재단을 거쳐간 다른 예술가들과는 달랐다.
<내 속에는 방화문 같은 게 없어서 한 곳에서 불이 나면 다른 곳으로 번져나갈 수밖에 없었다. 저 산불이니 모래 폭풍이니 불타버린 풍력발전소기니 폭염에 그을린 해바라기니 그런 것들이 계속 내 머릿속을 휘젓고 다녔는데 로버트는 나와 같은 감정에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그는 질척이는 땅을 최대한 피해서 해크니 걸음걸이로 경쾌하게 지나가는 산책자였다. 나는 그 초연함을 깨트리고 싶은 행인이었고.> p.178
5. 로버트 재단으로부터 자신의 작품을 지키려는 ‘사투’에 드러난 주인공의 심리를 통해, 작가에게 작품이 어떤 존재인지, 작가가 창작한 작품에 진짜와 가짜는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내가 간과한 게 있었다. 소각되어도 상관없는 작품을 만든다는 게 말은 쉽지만 그런 목적으로 시작했다가도 작가의 마음이 바뀔 수 있다는 것. 그걸 놓쳤던 것이다. 정말 그랬다. 한 작품을 소각용 제물로 삼음으로써 다른 작품들을 화염의 위기에서 구출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소각용 제물을 정교하게 만드는 과정, 로버트를 유혹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던 중에 그 작품을 다른 어떤 것보다 더 오래 바라보게 되었고, 그러다 정이 들어버렸다. 그것을 제물로 써도 괜찮은 것이었나? 혹시 정말 주인공을 알아보지 못한 것은 아니었을까? 곱씹을수록 내 마음은 조잡해졌다.> p.260
6. 작품의 가치는 예술가와 수용자의 소통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주인공 안이지가 구출해 낸 <R의 똥>은 진짜건 가짜건 불타지 않았기 때문에 완성된 작품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작가의 창작부터 불태워지는 그 순간까지가 온전히 <R의 똥>이 작품의 정체성을 얻는 것이기에 태워지지 않은 <R의 똥>은 진짜가 아닌, 아니 완성품이 아닌 것이다. 불에 타서 재가 되는 순간 비로소 완성되어 작가나 관객에게 존재하게 되는 그 이미지와 관념의 총합, 그것이 <R의 똥>의 본질이 아닐까.
작가의 가장 소중한 작품을 불태우는 행위는, 태우는 동안 작가가 겪는 고통과 관객이 그 과정을 지켜보며 느끼는 감상의 화학적 작용이 되어 그 작품의 또 다른 실체를 형성한다. 이 과정을 통해 비로소 작품으로서의 새로운 본질을 획득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어떤 예술작품이든 한 사회에서 통용되는 언어를 넘어설 수 없다는 뜻에서 예술의 생산은 ‘언어적 생산, discursive production’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작가의 마음, 의식 안에서 일어나는 어떠한 예술적 충동이나 작용도 언어적 과정을 통하지 않고는 전달될 수 없음을 시사한다. 동시에 언어적 생산이란 말은 한 작품이 의미를 가지기 위해서는 작품 자체로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수용자에 의해 해석되는 것을 전제로 할 때 가능함을 함축하는 것이다. 작품의 의미가 수용과정을 통해 부여되지 않으면 소통이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예술에서 “의미의 생산과 수용과정이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 <영상 커뮤니케이션과 사회>, 존 버거 중 강명구 교수의 권두 논문에서 인용
<불타는 작품>은 읽는 이로 하여금 진정한 예술이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질문하도록 전개되다가 열린 결말로 마무리된다. 소설을 다 읽고 났을 때는 한 편의 소설로 구현된 또 다른 방식의 <예술론>을 읽고 난 느낌이었다.
이성의 눈으로 소설을 읽었을 뿐인데, 읽는 내내 예술에 대한 마음이 불타오른 뜨거운 시간이었다.
지금까지 내가 던진 질문과 생각 역시 다원적인 텍스트를 수용하는 과정이기에, ‘반드시 작가의 의미구조와 일치할 필요는 없다’라는 강명구 교수의 글을 위안을 삼으면서, 쓴 글을 마무리한다.
<작가에 의해 구성되는 <의미구조Ⅰ>과 수용자의 해석을 통해 구성되는 <의미구조Ⅱ>를 살펴보자. 우리는 흔히 이 두 가지의 의미의 구조가 일치해야만 예술의 사회적 소통이 잘 이루어진 것으로 가정하기 쉽다. 그러나 텍스트의 의미가 다원적이며, 예술의 수용과정 역시 대화의 과정이기 때문에 양자가 일치하는 것이 바람직한 소통은 아닌 것이다. 예술가의 의미체계와 수용자에 의해 부여되는 의미체계의 불일치는 피할 수 없는 것이며 동시에 서로 다른 인식지평의 융합으로서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의미구조의 불일치를 작품의 ‘왜곡’, ‘엉뚱한 해석’이라고 부르는 것은 타당하지 않은 것이다.> <영상 커뮤니케이션과 사회>, 존 버거 중 강명구 교수의 권두논문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