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적 복종과 무기력한 선(善)의지

옳음이 아니라 눈치로 살아남은 자들의 윤리

by sun

착한 사람이 된다는 것.

그것은 언제부턴가 판단이 아니라 복종의 문제가 되었다.



“그렇게 해야 한다니까.”
“원래 그런 거잖아.”
“누가 그러더라.”
“그게 맞는 거지.”

이 말들 속에 ‘생각’은 없다.

순응만 있다.


우리는 윤리를 실천한다고 믿지만,

사실은 대부분 도덕이라는 대중적 명령어에

따르는 것일 뿐이다.


복종이 자발적인 선함으로 포장되며,

사회는 그 복종자들에게 ‘착한 사람’이라는 표식을 붙인다.


그러나 그것은 진실로 선한 것일까?




윤리는 원래 고통스럽게 고민한 끝에 내린 결단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윤리는 명령에 따른

습관적 반응으로 퇴화되었다.


사람들은 선악을 스스로 구분하려 하지 않는다.

그보다 편한 것은

‘이미 결정된 윤리’를 수동적으로 따르는 것이다.


더 이상 스스로에게 묻지 않는다.

“이것이 진정 옳은가?”

“나는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대신 사람들은 묻는다.

“이렇게 하면 욕먹지는 않겠지?”

“내가 이상한 사람 되는 건 아니겠지?”

자기 윤리의 기준을 타인의 판단에 외주화한 것이다.


우리는 복종하는 인간을 윤리적인 인간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복종은 윤리가 아니다.

그건 생각 없는 선의지이며,

스스로의 판단을 포기한 무기력한 선택일 뿐이다.


윤리적 복종

생각하지 않으면서도 착한 척할 수 있게

해주는 편리한 도구다.

그리고 그 도구는

권력과 시스템이 가장 사랑하는 장난감이기도 하다.


윤리의 복종적 사용은

결국 ‘악의 유지 장치’가 된다.

사람들은 부조리를 보면서도 침묵하고,

위선을 알아차리면서도 외면하며,

불의를 목격해도 “내 일이 아니니까” 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도

“나는 최소한 나쁜 짓은 하지 않았다”고 자위한다.


그 침묵과 무기력이야말로,

악이 발붙이는 가장 안락한 온실이다.


윤리적 복종자들은 악한 사람이 되지는 않지만,

절대 정의로운 사람도 아니다.

그들은 그저 안전한 거리를 유지한 채,

세상의 모순을 관찰만 하는 사람일 뿐이다.



윤리란

‘지켜야 할 규칙’ 따위가 아니라,

‘스스로 판단하고 책임지는 용기’다.



도덕이란

‘타인을 비난하는 근거’가 아니라,

‘나 자신을 매일 질문하는 고통스러운 과정’ 이어야 한다.




생각하지 않고 따르는 모든 윤리는

그 자체로 윤리의 죽음이며,

무비판적 착함이 곧 폭력이 되는 순간이다.


윤리적 복종은 착함을 연기하게 해준다.

그러나 연기는 오래가지 않는다.

진짜 선함은 복종으로 실현되지 않는다.


선의지는 판단하고, 선택하고, 책임지는 자에게만 존재한다.

그렇지 않은 모든 착함은

그저 무사안일한 자기보존 행위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당신이 진정 윤리적인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먼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나는 지금 생각하고 있는가?”


누가 뭐라 하든,

모두가 그렇게 하더라도

그 안에서 당신이 생각한 끝에 도달한 결론이 아니었다면,

당신은 윤리적이지 않다.

당신은 그저 타인의 판단을 복사하는 복종자일 뿐이다.


착한 척 말고,

생각하라.


칭찬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윤리적 인간이기 위해서.


윤리는 외부의 규범이 아니라,

내부의 각성이다.



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