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될 자와 잊혀질 자
죽음은 모든 인간에게 필연적이다.
그러나 사회는 이 필연조차 평등하게 다루지 않는다.
우리는 모든 인간의 죽음이 존엄하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죽음에도 계급이 존재한다.
뉴스를 켜면 알 수 있다.
유명인, 군인, 정치인의 죽음은 첫 화면을 장식한다.
반면, 고독사한 노인의 시신 발견 소식은
단신 뉴스의 하단에 짧게 지나간다.
공장에서 과로로 쓰러진 청년의
죽음은 몇 줄의 보도 뒤 곧 잊혀진다.
사회는 같은 죽음을 다른 무게로 다룬다.
이 차별은 단순히 미디어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의 심리가 그렇게 작동한다.
우리는 권력·명성·영웅 서사를
가진 죽음에는 감정을 투자한다.
반면, 주변의 평범한 죽음에는 무관심하다.
사회적으로 주목할 가치가 있는 죽음만이
‘기억할 만하다’고 배운 것이다.
권력과 자본이 만든 서사가 죽음을 소비하는 기준이 된다.
더 잔혹한 건, 어떤 죽음은 존중받기는커녕
공개적으로 조롱당한다는 점이다.
범죄자의 죽음, 자살한 연예인의 죽음, 사회적으로
미움받던 사람의 죽음은 ‘마땅하다’는 말과 함께 쓰인다.
군중은 도덕적 판결을 내린 뒤
마치 사형 집행이 끝난 듯한 해방감을 느낀다.
여기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복수와 쾌감의 완결점이 된다.
이 과정에서 진정한 애도는 존재하지 않는다.
‘슬픔’이라는 감정은 사회적으로 허락된 죽음에만 배분된다.
유명인의 장례식장에는 수백 개의 화환과 카메라가
몰리지만 이름 없는 사람의 관은 조용히 화장터로 향한다.
심지어 그 조차도 가족이나 지인이 없어
무연고 처리되는 경우가 많다.
죽음을 맞이하는 마지막 순간마저
사회적 존재감이 기준이 된다.
나는 이것을 ‘죽음의 시장’이라고 부른다.
이 시장에서 죽음은 상품처럼 등급이 매겨진다.
A급 죽음은 전국민이 애도하는 상품이다.
B급 죽음은 지역사회와 소수의 지인만이 기억한다.
C급 이하의 죽음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그리고 시장의 논리는 단순하다.
“얼마나 많은 사람의 감정을 움직일 수 있는가?”
이것이 곧 가치다.
이 차별은 교육과 문화 속에서 은밀히 강화된다.
교과서는 위인과 영웅의 죽음을 미화한다.
영화와 드라마는 주인공의
죽음을 극적인 장면으로 장식한다.
그러나 주변의 현실적인 죽음, 가난, 질병, 사고, 자살의
이야기는 가급적 무대 뒤로 숨긴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존엄한 죽음’과
‘비참한 죽음’을 구분하는 법을 배운다.
이 구분은 나중에 사회적 무관심과 결합하여
죽음의 차별로 이어진다.
문제는 이 구조가 너무 자연스럽게 작동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차별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차별이라는 자각조차 없다.
유명인의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무연고자의 죽음 앞에서
아무 감정도 느끼지 않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죽음을 존중한다는 말이 결국 선택적으로만 적용된다면
그것은 존중이 아니라 취향이다.
죽음을 계급화하는 사회는 결국 삶도 계급화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살아 있는 동안
자신의 죽음이 어떤 등급을 받을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기억받을 자격이 있는 삶’을 살기 위해 우리는 경쟁하고,
이미지와 서사를 관리한다.
심지어 죽음 이후까지 이어질 평판을 위해 현재를 소비한다.
이처럼 죽음의 차별은 삶의 방식까지 왜곡시킨다.
정말로 한 사람의 가치가 그 사람이 죽은 뒤
남기는 감정의 크기로만 평가될 수 있는가?
기억할 가치가 없는 죽음이란 존재하는가?
만약 그렇다면,
‘인간의 존엄’이라는 말은 그저 듣기 좋은 허구일 뿐이다.
죽음을 평등하게 대하는 사회란,
유명인과 무연고자의 관이 같은 무게를 가진 사회다.
그것은 애도의 형식을 통일하는 문제가 아니라,
죽음을 바라보는 시선의 문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마지막 순간에
똑같이 이 땅 위에 누운다는 사실을
의식적으로 기억해야 한다.
죽음은 삶의 결과이자, 모든 위선의 최종 심판관이다.
그리고 그 심판관 앞에서 누구나 평등하다는 진실을
우리는 너무 쉽게 잊는다.
사회가 죽음을 계급화할수록
우리는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