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의 수치심과 아이와 잘 맞지 않는 관계인 '베드 핏'의 관계
‘손이 부끄럽다’는 관용구가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무엇을 줄 때 민망해서 괜히 손이 긴장되는 상황을 뜻하죠.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를 주면서도 손이 부끄럽다고 표현할 정도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예전부터 ‘수치심’에 민감하게 반응했던 걸까요?
유독 자신의 요청을 거절당했을 때,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하는 사람들을 자주 보는데요.
이런 사람들은 마음에서 “그럴 수 있지. 괜찮아.”라는 말이 쉽게 꺼내지지 않죠.
이런 사람들은 상대가 자신의 요구를 거부하거나, 누군가 집단에서 자신을 배제하려 하면 그 의미를 확대해서 받아들이곤 합니다.
친구에게 진짜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 나의 요청을 거절하거나, 어린아이가 있는 나를 배려해서 직장 회식에 참석하지 않도록 빼준 것일 수도 있는데도 말이죠.
일반적으로 우리가 누군가에게 관심이나 애정을 주었는데 전혀 보답을 받지 못하거나 내가 소속된 집단에서 소외나 고립을 당할 때 수치심을 느끼는 건 당연한 반응입니다.
심리학자인 브라운은 수치심이 ‘침묵의 유행병’이 되고 있다며 비판적인 목소리를 높이는데요.
누구나 수치심을 마주하며 살아가면서도 수치심에 대해 말하려 들지 않는다는 것이죠.
우리는 왜 수치심을 느낀다는 사실조차 수치스러워하는 걸까요?
브라운(2019)은 수치심은 나에게 결점이 있어서 사람들에게 거부당하고 소속될 가치가 없다고 믿는 극도로 고통스러운 느낌이나 경험이다.라고 정의했습니다.
수치심은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가치가 위험에 처하는 상황’에서 드러나는 감정인 겁니다.
즉,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나라는 사람이 있는 그대로 존중받지 못하고, ‘내가 가진 쓸모나 중요성이 하찮다는 평가’를 받을 때, 수치심을 느낀다는 거죠.
사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수치심은 모든 사람이 느끼는 기본적인 정서입니다.
남의 집 앞에 쓰레기를 몰래 버리다 들키거나, 8차선 도로를 무단횡단 하다 걸리거나, 친구 생일 선물을 산다며 돈을 받아 게임 아이템을 산 게 들통났을 때, 수치심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정상적인 반응이 아니죠.
자신과 관련된 측면(외모, 성격, 능력, 태도, 재능, 습관, 심지어 기호까지)에서 단 한 가지라도 자신의 기대에 충족되지 않으면 부끄러움과 모멸감을 느끼는 겁니다.
과도한 수치심에 사로잡힌 거죠.
혹시 나는 매일 거울을 보며 이런 생각을 하진 않나요?
정말 마음에 드는 구석이 하나도 없어.
아이들은 성장하면서 부모의 판단을 받아들인다.
이것은 아이들의 놀이를 통해 관찰할 수 있다. 18개월 정도 된 유아는 자의식과 당혹감을 표정으로 드러낼 수 있다. 2세에서 3세 사이에는 자부심과 실패와 관련된 신호를 외부로 드러내기도 한다.
3세가 되면 부모의 반응을 충분히 자신의 것으로 통합하는 단계에 이르며 어떤 과제에 성공하지 못했을 때, '수치심'을 느낀다(랜서, 2018).
‘내가 신이다!’
영유아기 아동은 자신에게 전지전능한 힘이 있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고 믿는데, 삶의 도전 과제(예를 들어, 혼자서 걷기, 놀잇감을 조작하기, 타인의 반응을 이끌어내기 등)에 실패하게 되면 수치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대부분의 아이는 이러한 수치심을 자연스러운 감정의 하나로 받아들이는데, 너스바움은 이를 ‘원초적 수치심’이라고 했죠.
‘원초적 수치심’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소외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에 생기는 수치심과는 다릅니다.
‘원초적 수치심’은 자신이 잘못했을 때 느끼는 부끄러움으로,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정서로서의 수치심이니까요.
그런데 ‘원초적 수치심’이 사람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행동을 조절하는 역할(예를 들어, 아이가 거짓말이 들켰을 때 수치심을 느끼면 거짓말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과 같이)을 하지 않고, ‘나는 이런 것도 못하는 패배자야.’처럼 자신의 결점과 불완전함에만 초점을 두며 비약적으로 커지면 브라운이 말하는 정상적이지 않은 ‘수치심’이 되는 거죠.
부모인 내가 지나친 수치심을 느끼게 된 이유는 아마 부모(혹은 양육자)나 중요한 사람과의 관계에서 찾을 수 있을 겁니다.
‘부모와 어떠한 애착을 형성했는지, 내가 갖고 있는 부모에 대한 이미지는 어떤지, 부모나 친구가 나를 어떤 사람이라고 여겼는지, 부모와 친구와 갈등이 생겼을 때, 어떤 방식으로 대화했는지’ 등은 나의 수치심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준 요인들이니까요.
부모 혹은 부모 역할을 맡은 사람들이 자녀의 실제 자기를 완전히 또는 부분적으로 부정하거나 거부하거나 무시한다면 우리는 ‘가공의’ 정체성을 만들어내 적응한다.
그래야 우리가 처한 가정환경에서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조작된 정체성은 우리를 위장할 뿐만 아니라 실제 자기와 멀찌감치 떼어놓음으로써 성인기를 비참하게 만든다(랜서, 2018).
랜서의 말대로 부모가 아이의 능력을 넘어서는 기대를 갖고 그것을 이루라고 강요하거나, 반대로 아이가 무엇을 원하는지 관심을 보이지 않으면, 아이는 실제 자신의 모습을 부끄러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만들어진 거짓 자기’로 살아가게 되는 거죠.
이런 양육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은 내면에서 보내는 ‘진짜 원하는 것을 무시하고, 다른 사람이 원하는 것을 내면화’합니다.
“뭐 할래?”
“네가 하고 싶은 것.”
“넌 뭐 하고 싶은데?”
“난 잘 모르겠어. 네가 정해.”
수치심에 빠진 나는 점점 ‘진짜 자기’를 드러내는 것에 자신감을 잃고, 나를 자랑스러워하는 감각도 상실합니다.
과도한 수치심은 두려움과 불안을 끌고 다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의식하고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게 만들죠.
타인과의 사랑과 연결을 바라는 인간의 선천적인 욕구가 충족되지 않고 아이들이 받는 돌봄의 양식이 위니콧이 말하는 “정상성의 청사진” 모형에서 극적으로 멀어질 경우, 그 결과는 무너진 기대감의 심각한 유형으로 드러난다.
유전적 소산으로 인해 타인에게서 자연스럽게 기대하게 되는 감정적 조율을 받지 못할 때, '핵심 수치심'이 그 자리를 장악한다(Burgo, 2019).
생애 초기에 충분한 보호와 관심을 받지 못한 아이는 자신의 일부가 손상된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버고의 말대로 우리는 본능적으로 다른 사람과 연결되기를 바랍니까요.
처음에 말한 손이 부끄럽다는 말 기억나세요?
내가 부모에게 사랑을 원해서 손을 내밀었는데, 매번 부모가 그 손을 거절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나는 심리적 혹은 신체적으로 결함이 있어서, 부모로부터 사랑받지 못한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리고 혼자 있을 때나 누군가와 있을 때 모두 수치심을 마주하겠죠. 이게 바로 나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핵심 수치심'입니다. 나와 관련된 중요한 감정이 '수치심'이 되는 거죠.
자신의 일부가 망가져서 사람들 앞에서 나를 드러내기가 두렵나요?
진짜 나의 모습을 알게 되면 다들 나를 손가락질하며 비웃을 거라 생각하나요?
그렇다면 '핵심 수치심'이 나를 장악하고 있는 겁니다.
나와 관련된 부끄러운 감정이 내면에 산재해 있다면, 불필요한 수치심을 걷어내고 진짜 나를 나타낼 수 있는 감정들을 채워야만 합니다.
내가 느끼는 부끄러움은 나 때문이 아닙니다.
내게는 자랑스러운 손도 있고, 때론 창피한 손도 있지만,
그런 나에게 괜찮다고 말해주는 나는 제법 '멋진' 사람이니까요.
다음 시간에는 수치심이라는 정서가 정말 나쁘기만 한지, 과도한 수치심을 보이는 사람들은 어떤 특징을 보이는지 알아볼게요.
참고문헌
Brown, B. (2019). 수치심 권하는 사회(서현정 역). 경기: ㈜가나문화콘텐츠.
달린 랜서 (2018). 관계 중독(박은숙 역). 서울: 교양인.
Burgo, J. (2019). 수치심(박소현 역). 서울: 현암사.
사진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