험한 세상에 서로에게 다리가 되어줄 부모와 자녀가 되기를 소망하며
아이가 사용하는 언어를 보면 부모의 사랑이 보입니다.
영석이와 세은이는 어떤 사랑을 받고 자란 것일까요?
말에는 생각보다 '엄청난 위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우리의 감정과 사고와 행동과 연결되어 있으니까요.
에스키모가 사용하는 언어에는 눈과 관련된 단어가 수백 개도 넘는다고 해요.
눈을 표현하는 단어를 단 한 개밖에 모르는 사람은 그 단어만을 사용해서 눈을 지각하게 됩니다.
‘함박눈’이라는 단어만 알고 있다면, 모든 눈은 ‘함박눈’이 되는 거죠.
따라서 긍정적인 말보다 부정적인 말을 더 많이 아는 아이는 부정적인 단어를 통해 세상과 사람을 이해합니다.
영석이의 경우 자주 사용하는 “왜 안 돼?”라는 말에 비춰서 부모와의 관계를 인식하는 거죠.
“왜 안 돼?”라는 언어에는 부모가 자신이 하려는 것을 방해하는 대상이라는 점을 나타내고 있으니까요.
반대로 세은이는 “괜찮아.”라는 말을 통해 부모와의 사이를 지각합니다.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해도 수용해 주고 “괜찮다.”는 말을 들어온 세은이는 부모의 입장에서 공감하는 관계의 언어를 갖게 된 거죠.
잘 잤니? 좋은 꿈 꿨어? 사랑해. 오늘도 너랑 하루를 시작해서 감사해.
엄마가 오늘은 시간이 많지 않으니 부지런히 밥 먹자. 옷 입는 법 알지? 혼자서도 잘하네. 고마워.
빨리 일어나. 밥 먹어. 알아서 옷 좀 입어. 바쁘니까 서둘러. 아침부터 왜 이렇게 힘들게 하는 거야.
아이를 향한 부모의 본래의 마음은 ‘사랑’입니다.
결과 색이 조금 다를 뿐이지 잔소리를 하는 엄마나, 격려하는 엄마 모두 아이를 아끼고 소중하게 여기는 건 마찬가지죠.
그런데 문제는 부모의 사랑이 아이에게 어떠한 방식으로 전해지냐는 겁니다.
투박하고 거친 말과 행동으로 아이에게 사랑을 표현하면, 아이는 사랑의 원래 모습이 아닌 왜곡된 겉면을 진짜라고 믿기 때문이죠.
연애할 때 연인이 인상을 쓰고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사랑해.”라고 말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 사랑이 진심인지 아닌지 의심이 생기지 않을까요?
아이가 부모의 진심에 의구심을 갖고 ‘진짜일까, 아닐까?‘라는 사고의 덫에 빠지는 순간, 부모와의 관계는 어긋나기 시작합니다.
범죄 영화에서 믿었던 사람의 배신이 밝혀질 때만큼 극적인 반전이 없죠.
관객은 화면 앞으로 얼굴을 바짝 들이밀며 '어떻게 저 사람이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지? 앞으로 어떻게 될까?‘라며 이후에 전개될 내용에 궁금증을 품게 됩니다.
세상에서 가장 믿고 의지하는 부모를 의심하는 그때, 아이의 삶에 '반전'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아이의 인생 스토리는 예측불가가 되는 거죠.
아이는 자기 자신을 포함해 모든 것에 의문을 품습니다.
무엇이 진짜고 무엇이 가짜인지 항상 확인하고 구별하며 살아야 하기에,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심리적 에너지(마법의 콩)가 부족합니다.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사회에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는 일에 쉽게 지치고 피로가 쌓이니, 혼자 지내면서 사회활동을 하지 않는 사람으로 변해가기도 하죠.
아이의 입에서 나오는 언어는 주로 부정적인 말들이고, 그 안에는 사랑이나 희망, 감사나 행복 따윈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건 바로, 마음과 마음 사이에 보이지 않는 다리를 잘못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금문교는 1937년 완공 당시 세계에서 가장 긴 다리였습니다. 샌프란시스코의 바다의 폭과 길이가 길어 처음에는 다리를 건설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의견이 있었는데요. 기존의 돌을 쌓아 다리를 짓는 방식이 아닌 주탑과 앵커에 케이블을 늘어지게 매단 형태의 현수교로 지음으로써, 4년 만에 완공할 수 있었지요.
그렇게 치밀하게 주변 환경과 상황을 고려해서 만들어진 다리는 8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견고하게 유지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측량조차 하지 않고 부실한 재료를 써서 세웠다면 다리는 금방 금이 가고 무너졌을 겁니다.
부모는 아이에게 사랑을 전하기 위해 마음과 마음 사이에 다리를 만들게 되는 데요.
이 다리는 '애착, 교류, 정서적 유대, 양육태도' 등과 같은 다양한 이름으로 불립니다.
다리를 안전하게 건설한 후, 아이에게 사랑을 주면 아이는 부모의 사랑을 잘 전달받습니다.
그런데 환경이나 재료 등을 신경 쓰지 않은 채 귀찮고 번거로운 일이라 여기며 다리를 만들면, 결국 흔들리거나 무너져서 부모의 사랑이 아이에게 닿기도 전에 떨어지고 마는 거죠.
매일 아침에 일어나서 아이에게 건네는 말의 톤과 얼굴표정과 태도는 아이와의 다리를 만드는 재료가 됩니다.
'짜증 나는 목소리와 차가운 눈빛, 무표정한 얼굴과 불만이 가득한 부모의 태도'는 물에 젖은 나무처럼 부실한 자재인 거죠.
부모의 사랑은 아이의 언어가 됩니다.
그러니 아이의 말을 보면 부모의 사랑이 드러납니다.
아이의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타박하기 전에 아이를 지적하는 내 말투를 먼저 들어보세요.
그 말투 하나가 아이와의 사이에 놓인 다리를 만드는 재료로 쓰인다면, 백 년 가까이 수많은 태풍과 엄청난 무게에도 끄덕하지 않고 견뎌내는 다리가 될 수 있을까요?
부모 역시 감정이 있는 존재라 기분이 나쁘고 마음이 상할 때가 있단 걸 압니다.
그럴 땐 무의식적으로 가시 돋친 말이 튀어나오기도 하죠.
그렇지만 그 안에 사랑이 있단 걸 아이에게 알려주기 위해선 오해를 풀어야 합니다.
부모가 보낸 사랑이 가짜가 아니라면요.
한 번 부실한 재료를 사용했다면, 다리에 금이 가고 무너지지 않도록, 최소 두 번은 좋은 재료로 채워 넣어야 하죠.
과거의 나에 대한 후회는 큰 의미가 없습니다.
기억은 실제로 과거에 대한 내용이 아니다. 기억은 미래에 관한 것이다. 기억은 현재 우리가 무엇을 하는지, 그리고 미래에 무엇을 할지 알기 위해 우리가 이용하는 과거의 일이다(Minda, 2023).
인지심리학자인 민다의 말처럼 우리의 기억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위해 존재하니까요.
우리는 현재의 나를 원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과거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과거의 나의 모습을 뇌에 남깁니다. 그러니 실수를 반추하며 자신을 탓하지 말고 아이와의 다리를 잘 짓기 위해, 질 좋은 재료를 준비해야 하는 거죠.
다행스럽게도 우리의 태도와 감정과 사고 등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변화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태도가 오랫동안 일관성을 유지하며 똑같다고 믿지만, 정말 그럴까요?
불과 1년 전만 해도 육식을 선호하는 저는 콩으로 만든 고기에 대한 편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축이 도살되는 과정을 알게 된 후, 콩고기에 대한 관심이 커졌고 심지어 맛있다는 생각까지 들었죠. 싫어했던 대상을 선호하게 된 겁니다.
이렇게 시간과 경험에 의해 우리의 태도는 바뀝니다.
우리는 매일 달라지고 있습니다. 중요한 건 '방향'이죠.
아들러는 목표를 바꾸면 정신적인 습관과 태도가 변화한다고 설명합니다.
제가 대체육에 대한 관심을 갖는 걸로 목표를 수정하고 나서 콩고기에 대한 태도가 변화했던 것처럼요.
그러니 과거의 나에 붙잡혀 오늘을 살기 보단, 오늘의 새로운 목표를 정해 보세요.
아침에 일어나 아이에게 건네는 부모의 '첫마디, 첫 표정, 첫 몸짓'을 보며, 아이는 오늘도 열심히 다리를 만들테니까요.
그렇게 부모의 사랑을 온전하게 건네받은 아이의 언어에는 자신과 다른 사람에 대한 믿음과 이해, 존중과 배려가 담겨 있을 테고, 부모가 기쁠 때 진심으로 축하하고 부모가 슬플 때 진정으로 위로하는 사람으로 자라겠죠.
부모의 사랑은 아이의 언어가 되고, 아이의 언어는 부모에게 꿈이 됩니다.
백 년이 지나도 무너지지 않을 다리에 대한 '희망의 꿈' 말입니다.
참고문헌
Minda, J. P. (2023). 인지심리학(노태북 역). 경기:(주)웅진싱크빅.
사진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