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스코 베지테리언으로 산다는 건
요즘은 채식이 많이 보편화되고 있어서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 것 같지만 채식에는 여러 단계가 있다. 고기를 먹지만 간헐적으로 채식을 실천하는 플렉시테리언(Flexitarian), 붉은 고기는 먹지 않고 가금류까지 먹는 폴로 베지테리언(Pollo vegeterian), 육류는 먹지 않고 해산물까지 먹는 페스코 베지테리언(Pesco vegeterian), 달걀, 우유, 유제품까지 먹는 락토 오보 베지테리언(Lacto-ovo vegeterian), 우유와 유제품까지 먹는 락토 베지테리언(Lacto vegeterian), 달걀까지만 먹는 오보 베지테리언(Ovo vegeterian), 그리고 모든 동물성 식품을 먹지 않는 완전한 형태의 비건(Vegan). 크게 이렇게 나뉜다. 나는 이 중에서 해산물까지 먹는 단계인 페스코 베지테리언인 것이다. 이 글에선 페스코의 애환을 담아보려고 한다.
먼저 내가 왜 페스코 베지테리언으로 시작했는지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비건은 자신이 없었다. 고기를 그렇게도 좋아하던 나였는데 해산물, 달걀, 우유까지 모두 안 먹고 채소만 먹어야 한다면 일주일도 못 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리고 내가 사는 지역엔 비건 식당이 별로 없어 사람들을 만날 때 어떡하지란 고민이 제일 컸다. 동물과 환경 그리고 나를 위해 시작하는 채식이지만 내 성격상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할 일이 많아지면 지속적으로 실천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래서 페스코로 시작하게 된 건 어떻게 보면 일종의 타협이라고 볼 수 있겠다. 비건으로 살고 싶은 자아와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싶은 자아의 타협.
우유를 끊는 것은 생각보다 쉬웠다. 두유나 아몬드유, 귀리유 같이 대체품이 많았기 때문이다. 라면에 넣어 먹는 달걀이나 비빔밥 위 달걀 프라이가 그리웠지만 안 먹어도 그럭저럭 잘 살 수 있었다. 문제는 해산물이었다. 내가 해산물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외식할 때 육류를 먹지 않으니 그 다음 차선책이 해산물이었다. 비건 식당이나 비건 옵션 메뉴가 있는 식당에 가지 않는 한 육류와 해산물을 모두 먹지 않으면 갈 수 있는 곳은 샐러드 가게 정도였다.(비건은 풀때기만 먹는다는 편견을 가지는 사람도 있지만 실제로 샐러드 가게에 가서 완전한 비건으로 먹을 수 있는 메뉴는 얼마 없다.)
집에서 혼자 밥을 챙겨 먹을 땐 비건으로 살 만했다. 그렇지만 외출을 하고 사람들을 만날 때면 뭘 먹어야 할까 고민이 너무나 크게 다가왔다. 의심쩍은 국물이 담긴 메뉴를 먹느니 차라리 초밥을 먹는 게 더 마음이 편했다. 그렇게 지내다 보니 채식을 시작하기 전보다 해산물을 더 많이 소비하는 것 같았다. 때때로 내가 종차별주의자가 아닐까, 지금에 삶에 안주하려는 건 아닐까 많은 고민이 들었다. 그렇지만 ‘페스코 베지테리언이 되어야지.’라고 다짐했던 것보다 ‘완벽한 비건이 되어야지.’라고 결심하는 게 훨씬 어렵게 느껴졌었다. 지금도 친구들을 만날 때 고기를 피해서 메뉴를 정하느라 힘든데 해산물도 먹지 않으면 만나기가 너무 힘들 것 같았다. 내가 액젓이 들어가지 않은 비건 김치를 사면 엄마는 "집에 김치 많은데 뭘 또 사먹니."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냥 불편한 마음을 감추고자 ‘때가 올 거야. 처음 채식을 시작했을 때처럼 자연스럽게 되는 날이 올 거야.’라며 나를 위로했다.
사람이 생각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게 정말인지 아니면 내가 나한테 속은 건지 꽤 오래 고민하고 괴로워한 거에 비해 요즘은 자연스럽게 내가 할 수 있는 비건 지향에 집중하고 있다. 나는 여전히 비건은 아니다. 때때로 우유가 든 빵을 먹고 좋아하는 새우도 먹을 것이다. 그렇지만 값이 조금 더 비싸고 구하기 어려워도 우유가 들어가지 않은 모닝빵을 먹으면서 마음이 편안했고, 새우를 넣지 않은 오일 파스타를 먹으면서 내심 뿌듯했다. 어쨌든 지금 내가 가고 있는 방향이 틀린 건 아니라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렇게 불완전하더라도 이 방향성을 지켜나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