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자발적 전업주부와 시크한 바깥양반
비자발적 전업주부와 시크한 바깥양반
2. 민증 까봐
초겨울의 캠퍼스는 쓸쓸했다. 제각기 학기를 마무리 짓기 위해 열람실, 독서실 등지에서 바빴고, 늘 시끌벅적하던 광장도 추워진 날씨 탓에 인적도 드물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처음 만났다.
우리는 조금 남다른 연유로 바빴다. 연말에 있을 총학생회장 입후보를 위해 서명을 받고 있었다. 다만, 각자가 지지하는 후보는 달랐다. 상대가 뭘 하는지 뻔히 알고 있지만, 일면식도 없고 입장도 다르다 보니 딱히 말을 걸 이유는 없었다.
오고 가던 학생들이 모두 수업에 들어갔고, 쉬는 시간이 되기 전까지 우리가 할 일은 없을 터. 넓은 광장에 단둘이 남은 우리는 어색하게 인사를 나누었다. 통성명이 있고 나이를 묻자마자 그녀는 내게 말했다.
구라 치네, 민증 까봐.
1n 년 전 나는 놀랍게도 지금과 외모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금이 제 나이에 어울려졌다면, 당시는 썩 노안이었다. 내 신입생 시절을 보지 못했던 복학생 선배들이나 타과 선배들은 실제로 내 신분증을 보기 전까지 내가 연하라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암만 그래도 초면에 신분증 좀 보자니. 경찰도 아니고. 나이 차이가 한 살에 불과하다는 걸 확인한 그녀는 그 즉시 모든 격식을 내려놓았다. 딱히 친절함이나 예의를 바란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격 없이 대할 줄이야. 여러모로 우스운 첫 만남이었다.
얼마 뒤 선거에서 내가 조력하던 후보가 당선되었고, 그녀는 본인 학과의 임원이 되었다. 그 덕에 여러 교내 행사 등에서 마주칠 기회가 늘었다. 같은 시기 나는 그녀의 학과 사람들과 친해질 기회가 많았고 그녀는 그중 한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한번은 여럿이 어울린 술자리를 오가던 중 구석에 주저앉아 고민을 토로하던 그녀가 눈에 들어왔다. 지금까지도 여전한 그녀의 장점 중 하나는 그녀가 자신이 맡은 역할, 사람과의 관계 등에 대해 정말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당시 그녀는 학과 임원으로서의 자신의 역할, 사람들과의 관계, 고민과 한계 등 다양하고도 섬세한 고민들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그녀에게 사정없이 팩트 폭격을 날렸다. 당시 나는 위로에는 참 재주가 없는 사람이었다(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공감보다는 판단이 앞서곤 했다. 그녀의 고민은 참으로 기특한 것이었지만, 한편으로 사람들의 크고 작은 반응 하나하나에 상처받고, 가능하면 손해 보는 식으로 일을 처리하려는 그녀의 태도가 조금 미련해 보였다. 그 미련한 친구 옆에 나란히 주저앉아 한참을 떠들었다.
초면에 민증 까라며 당돌하기 그지없던 그녀는 정작 이렇게나 섬세하고 한없이 친절한 사람이었다. 이날의 대화는 우리가 처음으로 긴 시간 나눈 것이었지만 그 형식이나 구성은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녀는 여전히 세상에 친절하고 진심이다. 덕분에 옆에서 보는 이에게 답답함과 속상함을 선사한다. 나는 여전히 그녀가 타인을 위해 자신을 소모하는 모습이 답답하고 속상하다. 그래서 위로와 칭찬보다 질책이 앞선다.
그래도 그녀의 미련한 친절함은 결국 10여 년에 걸쳐 나를 전염시켰다. 말려도 소용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뒤부터는 화를 내기보단 가능한 효율적으로 도우려고 애쓰곤 한다. 물론 그녀는 여전히 내가 화부터 낸다고 생각하겠지만.
※ 바깥양반의 한 마디
사실 민증을 보고도 믿을 수 없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