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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웅보 Jan 19. 2023

9. J여사의 전시어머니의 장례식

엄마가 이혼했다, 마침내

엄마가 이혼했다, 마침내
   
9. J여사의 전시어머니의 장례식      



J여사는 시간이 지날수록 회복력이 빨라졌다. 수십 년에 걸친 그녀의 화려한 경력과 60에 가까운 나이에도 여전히 생동감이 넘치는 그녀의 아우라는 보는 이로 하여금 그녀를 매력적인 협업 파트너로 판단하기에 충분했다. 그녀는 의식하지도 않던 이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고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협업 제안을 받으며 일상의 활기를 더해갔다. 새로 다니기 시작한 교회에서는 청년들조차 손 놓은 크리스마스 장식을 홀로 전부 해냈을 정도였다. 그녀가 B씨 없는 일상을 쌓아가듯 우리 역시 B씨 없이도 여전히 가족이었고, 함께 단란한 연말을 보내며 보다 나아진 이듬해를 그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J여사에게 B씨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는 자신의 모친이 임종을 앞두고 있다며, J여사에게 곧 있을 장례식에 함께 해달라고 요청했다. B씨는 그들이 아직 이혼하지 않았고(서류상으론) 따라서 그녀가 당연히 장례에 함께할 것이라 여겼다.   


J여사는 일언지하 거절했다. 그들은 사실상 이혼한 사이이며 귀책 사유는 오롯이 B씨에게 있었다. 그의 가족 경조사에 그녀가 참여할 이유는 없었다. 심지어 그녀와 전시어머니의 관계 역시 연결다리가 끊어지면 남이 되어버릴 딱 그 정도 사이에 불과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그와 혈연관계였고 도리로서 장례식에 참여하는 것이 마땅했다. 문제는 장례식 자체가 아닌 B씨와의 만남이었다. B씨에 대한 나의 감정은 이미 지난 시간 이로 말할 수 없는 실망감과 배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고, 우리의 관계는 마치 J여사와 전시어머니의 관계처럼 연결고리가 사라지니 그대로 멀어져 버릴 사이가 되어있었다(비록 B씨는 아니라고 여길지 모르겠으나).   


정말로 오랜만에 B씨에게 먼저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장례와 관련하여 J여사에게 또 다시 연락했다간 나도 장례식에 가지 않을 것이라 엄포를 놓았다.      



B씨 모친의 임종이 임박했다는 소식에 나는 가능한 마음을 평온하게 유지하려 노력했다. 평온하지 못하다면 차라리 마음과 감정을 잠시 격리해서라도 조용히 자리만 지키고 오자고 다짐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다짐은 오래가지 못했다. B씨는 모친이 임종한 날, 장례식장 입구에 게시되는 유가족 명단에 J여사의 이름을 올리겠다고 통보해왔다.      


한창 J여사가 우울감에 허덕이고 있을 때, 그녀의 전화를 받으며 들리는 첫 마디 ‘여보세요’ 하나에 이미 내 마음도 같이 무너지곤 했었다. 그 단 네 글자를 읊는 그녀의 음성이 너무나 무거운 감정에 적셔져 있음이 여실히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이날 앞서 설명한 소식을 전하는 그녀의 전화에서 아주 오랜만에 그 감정을 다시 느꼈다.   


J여사는 이 역시 거절하였다. 이름은 있는데 사람이 없으면 본인만 이상한 사람 되는 것이 아니냐며.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였다. B씨는 그럴 의도가 없었다고 변명했다. 그 얘기를 듣고 생각했다. B씨는 자신의 행동 여파를 충분히 예상하고 고려하지 못할 만큼 지능이 떨어지거나, 스스로의 의도가 나쁘지 않으니 결과에 따른 책임도 덜하다고 생각하는 비윤리적인 사람이리라고. 아마 모두 해당하겠지. 슬프게도.   


J여사는 만약 자신의 경고를 무시하거나, 또는 식장에서 자신이 거론된다면 아들이 절대 가만있지 않을 것이라고 협박했다. 그녀는 나를 팔았다며 사과했지만, 그 사과는 불필요했다. 충분히 사실이었으니까.      



장례식장으로 향하는 길이 하필 퇴근 시간에 걸려 평소보다 곱절의 시간이 걸렸다. 네비게이션이 반복적으로 도착시간이 더 지연될 것으로 수정했으나 마음은 전혀 급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러다 접촉사고라도 나서 장례식장에 가지 않을 좋은 핑계라고 생기기를 내심 바랐다.   


도착한 장례식장은 생각보다 사람이 붐볐다. 오랜만에 만난 친척들은 손님을 받느라 바빴고 덕분에 내가 B씨와 인사조차 나누지 않았다는 사실을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J여사와 유일하게 연락을 주고받는 큰어머니의 배려 덕에 그녀가 자리에 없는 것을 그 누구도 문제 삼지 않았다. 사촌들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이 자리에 있는 것이 걱정했던 것만큼 불편하지 않다고 여겨질 정도였다.      


잔소리, 훈계, 충고. 무어라 불러야 좋을까. 뭐가 되었든 나는 더 이상 B씨에게 할 말이 남지 않았다. 할 수 있는 말은 많지만 하고 싶은 말은 없다. 무슨 말을 하든 그가 변할 거라는 기대가 이제는 없어져 버렸으니까.   


J여사와 B씨가 헤어진 이후 내가 B씨에게 당부한 것은 단 하나였다. 가만히 있으라. 연락하지도, 찾아오지도 말라. 하지만 B씨는 그러지 않았다. 심지어 이번 장례식을 앞두고 J여사에게 황당한 요구를 해왔을 때도 그는 그 요청이 왜 잘못된 것인지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마치 억울하다는 듯 항변하는 그의 말에 나는 확신했다. 어떤 말이나 행동 현상에 대해 그와 의견을 나눌 힘조차 나에게는 남지 않았다는 것을.      


장례식이 조금 한산해지자 그가 넌지시 말을 걸어왔다. 핸드폰 요금제가 어쨌다나. 기가 찼다. 고작 꺼낸다는 말이… 나는 그에게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다고 통보했으나 그는 곧이어 또 다른 주제로 말을 걸어왔다. 이러니 J여사가 정신이 나가고도 남지.   



장례식장을 나서며 친척 어른들이 입관식과 발인 일정 등을 말씀해주셨지만 한 귀로 흘렸다. 이 이상 B씨와 한 공간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거짓말같이, 발인이 있던 날 차가 고장나 참석할 수 없었다. 화장터와 묘지가 자가용이 아니면 가기 어려운 외진 곳이기도 했지만,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가야겠다는 마음이 들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온갖 잡생각에 새벽까지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웠지만, 막상 상황이 이렇게 되고 나니 머리가 맑아졌다. 그냥 이대로 B씨와의 인연이 끊어져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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