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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매 Sep 22. 2022

[나의 파라다이스] 꿈은 서울사람

01. 서울사랑



타고나길 어딘가에 소속되어야 안심하는 사람이다. 이건 그 언젠가 건대입구역까지 찾아가 5만원에 20여분의 사주를 봐주는 역술가의 말이었다. 딱히 사주를 믿는다거나 무속신앙에 의지하는 타입은 아니지만 왠지 모를 호기심에 본 사주였다. 여기에 찾아올 만큼 용기가 있는 사람도 아닌데, 무슨 바람이 불어 움직였는지 흥미롭다는 표정을 하고 있던 역술가가 또렷하게 기억에 남는다. 평범한 일상을 영위하고 일정한 급여가 들어오는 30대에게 생긴 알 수 없는 ‘불안’은 생각보다 오랫동안 마음을 어지럽혔다. 서울이 좋았고, 그런 서울에서 10년 가까이를 살았고 나름의 꿈도 있었으나 인구소멸을 앞두고 있는 시골로 들어설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캐리어를 끌고 서울을 떠나오며 엉엉 울던 나의 모습이 여전히 머릿속에 선하다. 기쁜 마음과 슬픈 마음이 공존하던 그때에 현재는 없고 과거와 미래만이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인생의 가장 큰 전환점인 그날이 감사할 뿐이지만 말이다.


‘서울사람’이 되는 건 20대의 꿈이었다. 서울사람만 되면 모든 걱정이 끝이 날 것만 같았다. 풍족한 서울의 문화를 먹어치우고, 도처에 널린 편리한 인프라가 나란 사람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켜주리라 상상했다. 아주 틀린 상상은 아니었다. 실제로 서울에서 얻은 교양과 지식 그리고 학문은 현재의 나를 있게 한 자양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순한 이상향을 서울사람으로 치환해 생각한 건 이제와 생각해보면 아쉬운 일이었다. 한마디로 번짓수를 잘못 짚은 셈이었다. ‘서울에 있는’ 나에게 집중하는 것이 아닌 서울에 있는 ‘나’에게 집중했어야 한다. 어떻게든 내가 하고 싶은 걸 찾고 다듬어 나아갔어야 하는데 자꾸만 남들에 비해 조금씩 늦고 말았다. 가장 큰 이유는 정보력이었다. 정보를 어디에서 습득하는지도 몰랐고 습득하더라도 어찌 사용해야 할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하필이면 나의 전공을 지독하게 사랑해버리는데, 이 전공 또한 사회와 귀결되는 실용적인 학문과 거리가 있었다. 때문에 간신히 찾은 꿈은 이미 저만치 달아나있었고 손에 남은 꿈은 ‘공무원’이 전부였다. 사람들은 왜 대학까지 나온 사람이 공무원을 꿈 꾸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어찌저찌 ‘대학까지’ 나왔기 때문에 공무원을 꿈 꾼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문과의 입장에서는 안정적인직장을 갖고 남들처럼 원하는 나이에 결혼을 하기란 쉽지 않다. 지방에서 서울로 유학을 온 학생들은 어지간한 서포트가 있지 않고서야 전셋값이든 월셋값이든 오를 걱정이 없는 주거 환경과 생활비를 충당할 직업을 얻는 것이 생각보다 어려웠다.


언젠가 학교를 휴학하고 종로의 자그마한 회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때였다. 우연히 직원들의 급여명세서를 보았고 집조차 가지 못한 채 야근에 시달리는 그들이 그 위로 오버랩되었다. 게다가 그들은 원하는 분야에서 일을 하고 있다곤 하지만 다들 무엇을 위해 일하고 누구를 위해 일하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점심시간마다 나누곤 했다. 공무원은 적어도 누군가의 완벽한 목적을 위해 이용되진 않으리라 생각했다. 어린 생각이지만 그때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고 싶은 직업은 여행과 관련된 일이었으나 나의 마음은 몇 번의 낙방과 좌절 끝에 점차 공무원이란 직업에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공무원도 다양한 분야가 존재했다. 국가직, 지방직이란 큰 갈래가 있고 그 아래로 다양한 직렬들이 존재한다. 특별한 자기 분야가 없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기웃거리는 직렬은 단연 일반행정직이다. 9급의 경우에는 사회와 같은 이름부터 익숙한 시험과목이 있으니 많은 이들이 일반행정직으로 발을 들이곤 한다. 짧게는 몇 개월에서 길게는 5년 정도까지 이 시험에 도전하는 이들이 많은데 처음의 목표와 달리 점점 다양한 직렬과 여러 지역으로 눈을 돌리게 된다. 나는 계속해서 다른 직업에도 도전을 하며 공무원의 시험에 딱 반 정도의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올인을 하기엔 공무원 시험은 늪처럼 보였다. 또한 앞서 말했듯 ‘서울사람’이 꿈인 어린 나에게 하루라도 빨리 서울에서 자리를 잡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울사람, 이제는 추억이자 다른 사람을 위한 단어인 그것은 보기 좋게 아홉수, 스물 아홉의 가을에 보란 듯이 나에게서 멀어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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