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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브론즈실버 May 22. 2023

#19. 70대의 나에게 미안해서, 싫은 일은 못하겠다

존버해 보라는 조언에, 퇴사라는 답을 던지렵니다.

처음 영업팀으로 와서, 제일 먼저 했던 일은 유튜브, 구글링이나 책을 통해 '요즘' 영업 트렌드를 찾는 일이었다. 유튜브나 구글은 모르는 게 없다. 하물며 의사들도 구글링으로 진단하는데 도움을 받는 요즘인데!


기획자나 마케터, 프로그래머들은 '어떻게 일해야 하는지'에 관한 콘텐츠가 쏟아져 나오는 요즘이다. 폴인 같은 뉴스페이퍼들은 마케터에게 더 뾰족한 통찰력과 시장동향을 안겨줬고, 기획자들은 A/B 테스트라던가 GA데이터를 분석해서 고객의 니즈를 찾아냈다. 심리학을 곁들여 내는 UX는, 어떠한가. 그야말로 기깔난다. 모바일/웹 환경은 싸이월드로 친구들과 친목을 시작했던 내게, 이 모든 건 흥미로웠다.  


그래서 영업에서도 '요즘' 트렌드를 찾고 싶었다. 발로 뛰는 거 말고, 비 오는 날 처량하게 방문하는 거 말고, 또는 전화 영업 말고, 제안서 뿌리는 거 말고, 다른 방법 없나?


안타깝게도, 나는 여지껏 찾지 못했다. 유튜브에 계신 머리를 쫙 올린 보험왕분들이나, 외제차를 타면서 좋은 집을 자랑하는 분들 말고.


결국, 영업의 왕도는 뒷굽이 닳는 방법뿐일까


'와, 여기 진짜 좁디좁은 업계구나.'를 물씬 느낀 날은, 무려 영업팀 명함을 들고나간 첫 미팅부터였다.


얼마나 긴장됐겠는가. 영업이라고는 난생처음인데! 우리 서비스가 얼마나 좋은지, 안 쓰면 왜 손해인지 알려주면 되니까. 강점, 차별점, 관련 데이터들을 준비했다. 사생 대회날 모두가 12 색깔 물감을 쓸 때, 나 혼자만 36색 물감을 준비물로 들고 가는 것처럼 한껏 든든하게 준비한 미팅이었다. 그런데, 서비스... 그런 건 안중에도 없었고 중요하지도 않았다.


"아니, 그건 그렇고 A거래처에 김 OO부장이 B거래처로 넘어간 거 알아요?"

"알다마다요. A거래처에 이ㅁㅁ 꽂아놓고 B거래처로 넘어간 거예요. 그리고 C거래처 그... 그 누구였더라.. 그 이사님..."

"아!  이 OO 이사요?"

"맞아요! 그분! 그분 말고 그 D거래처에 그... E거래처에서 넘어오신 그분은 혹시 아세요?"

"아, 그 그.... 최ㅇㅇ 부장님 말씀이시군요!"

"맞아요, 제가 그분 소개해드릴게요!"

"아휴 감사합니다~~"


첫 미팅에서만 이럴 줄 알았는데, 불행히도  [겹치는 사람 찾기]는 앞으로 진행되는 모든 미팅의 단골 소재로 등장했다. 심지어 매번 다른 거래처들이, 학연지연혈연이 아닌 관계로 얽혀있었다. 업계가 좁다 보니까, 서로가 서로를 알고, 사람이 사람으로 제휴를 맺는 형국이었다.


뭐, 다른 업계도 이럴지 모르겠지만, 어지간한 인명부사전이 나올 때마다, 나는 '영업을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점점 간절해졌다. 영업이 나쁘다는 게 아니다. 나랑 맞지 않는 것뿐이다.


적어도, 이 업계에서 계약을 잘 따내려면, 1. 저런 분들과 나도 친해져야 할 테고 2. 근데 정말 99%의 사람들이 4050대 아저씨였고, 3. 여자가 영업을 한다 하니 기저에 무시하는 바탕이 깔려 있었다. 조금의 성희롱 같은 것도 있었고.  


이런 걸 버텨내려면 1. 많은 돈 2. 야망 3. 적성에 맞는 일이어야 했을 거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안분지족을 배웠고  남자가 대다수인 집단에서 여자로 살아남는 것은 무모한 도전이라는 걸 안다. 마지막으로 적성에 맞는 일은, 아니었다.


미팅 가는 날은 짐이 주렁주렁, 덕분에 체력 닳는 게 광속급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봐서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나는 돈으로 동기부여가 강하게 되는 사람은 아니구나, 영업은 적성이 아니구나!"라는 걸 알게됐다. 역시 해보지 않으면 모른다. 뒤돌아 봤을 때 미화가 될 수 있는 정도의 일이라면, 직접 경험하는 건 썩 나쁘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존버'는 승리한다는 말이 익숙하대도.

시간이 이리도 소중한데, 고통이자 괴로운 나날을 엿가락처럼 길게 늘이고 싶진 않다. 분명 더 자주 나에게 기쁨이나 즐거움, 또는 "아!"와 같은 깨달음의 순간을 더 자주 느끼게 해 줄 수 있는 일이 있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잠자는 걸 제외하고는, 일하면서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내는데, 적어도 '죽도록 하기 싫은 일'은 가급적 피하고 싶다. 나중에 70대가 되고, 1분 1초가 너무나 소중해지는 그때의 나에게 미안할 것 같으니까.


왜 하고 싶은 걸 다 할 수 있던 젊은 나날에 주어진 시간을 귀하게 쓰지 않았냐고. 싫어하는 일로 달력을 떼우기엔 너무 짧은 삶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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