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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브론즈실버 May 30. 2023

#23. '집안꼴 흐린 눈 하기' 능력치 강화가 필요해

우리 엄마 아빠한테도 배운 적 없는, 실전 동거생활 1

남자친구와 함께 산 지 3년 차가 되었다. 자취생인 척하면서, 칫솔은 상대편 집에 갖다 두는, 비공식적으로 함께 사는 그런 동거가 아니라 양가 부모님께 꾸벅 인사를 드리고 당당히 살림을 합쳤다. 등기부등본을 떼면 한 사람이 동거인으로 뜨는, 나름 나라에서 인정해 주는(?) 공식적인 동거를 하고 있다.

  

지금 돌이켜 보면 부모님께 동거 허락 절차를 거치는 데 있어,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구렁이가 스르륵 담 넘어가듯,  어디 덜컥 걸리는 부분이 하나도 없었다. 다시 돌아봐도 이상할 정도로 아주 순조로웠다.


"독립할게요. 기철오빠와 함께 살게요."라고 말했을 때, 딸 가진 우리 엄마아빠는 한사코 반대는 커녕, 의연하게 그 나이가 그런 나이려니, 당연하단 듯, 받아들였다. 남자친구의 말로는 본인이 ‘착해 보이고 믿음직해서 그렇다.'라고 했지만, 음, 아마도... 부모님은 ’말릴 수 없다.‘고 생각한 것 같다. 하긴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하지 않던가.

복도식 아파트의 현관문을 열면, 개나리가 한가득 보일 때, 그런 봄날에 이사 왔다


그리고,  나를 낳고 엄마와 살아보고 나서야 서로 맞지 않음을 꽤나 뒤늦게 알아챈 아빠는, 더더욱 '살아보고 결혼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라고 진심으로 생각한 것 같다. 다만 애를 낳으면 미리 동거하는 건 의미 없다고 강조했던 건 잊혀지지 않는다. (개방적인 건 원체 알았지만, 이 정도인 줄은..., 나도 그제서야 알았다.)




3년째 살면서 점점 더 확실해져 가는, 같이 별 탈없이 살아가는데 아주아주 중요한 스킬이 있는데, 바로 어질러짐을 '흐린 눈'하는 능력이다. 보통 신혼부부가 막상 같이 살기 시작해서 치약 짜는 법, 던져놓은 양말 같은 걸로 싸운다고 하던데,. 우리는 전혀? 그런 걸로 절대로 싸우지 않았다. 왜냐면 그냥 '안 보이는 척' 했기 때문이다.


그게 보이기 시작했다면? 이제 그럼 지는 거다. 보이는 사람이 치워야 한다. 그걸 알게 된 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흐린 눈을 시전 하는 날들이 많아졌다. 능력은 점점 더 고도화되어 특정 부분만 안보는 것도 가능해졌다.  


집안꼴이 이게 뭐니, 에 '집안꼴'이란 바로 이런 거 아닐까?


게임 속에선 포인트를 모아 특정 능력치를 높일 수 있는데(스탯 쌓기), 나는 흐린 눈 하기 스킬을 강화하는데 꽤나 많은 포인트를 썼다. 고로, 처음에 나는 남자친구보다 더 많이 봤다는 소리다.


예컨대, 샴푸를 거의 다 써가면 혹시나 떨어질 때를 대비하여 새로운 샴푸통을 꺼내놓았다. 나는 새 샴푸 냄새가 너무 궁금해서 그걸 먼저 써봤고, 남자친구는 기존 걸 먼저 다 쓰겠다고 했다. 시간이 지나 먼저 쓰던 샴푸통이 텅텅 비면, 그저 한동안 욕실 바닥 오만데를 빈통으로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그는 치우지 않았다.


처음엔 이게 보였다.

'어? 다 썼나 보네? 근데 왜 안 치우지? 흠, 언제 치우나 지켜볼까?'

...... 3일..... 5일.... 일주일.... 10일...... 그럼 이제, 내가 치우는 그런 식이었다.

짝 다른 신발이 화장실 구석에 모아져 있다. 함께 있으니, 그나마 양반이다.


비 오는 날 집에 들어올 때 쓴 수건이 일주일 지나도록 현관 앞에 있고, 냉장고에서 흰색 곰팡이 피는 청양고추랑 유통기한이 지난 두부, 오래된 밑반찬. 이런 게 내 눈에 보여서, "오빠, 냉장고는 내 거야? 안에 뭐가 있는지는 알아!?"라고 싸운 적도 있었다.


그런데 다 부질없다. 그에게 보이지 않는 걸, 보게 할 순 없었다. 그래서 그냥 나도 흐린 눈 하기로 했다. 그랬더니, 우린 조금 더 행복해졌다.




물론 내가 안 보이는 게 그에게만 보일 때도 있다. 그냥 벗어놓은 옷가지들. 그리고 차마 공개된 장소에선 말하기 좀 '그런 것'들이 그에게 먼저 보일 때도 있는데, 그 역시 그냥 안 보이는 척하거나, 아니면 이런 걸 '발견했음'을 알려줬다. 그럼 나는 카톡 메시지를 받은 것처럼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게 쪼르륵 가서 치운다.


모름지기 비교는 어제의 나하고만 하는 것이라고 하지않던가. '내가 더하는 것 같은데!? 내가 이거 하는 동안 너는 뭐 해?'라고 하며, 처음부터 비교하지 않는 게 서로에게 좋은 길이다.

그리고 언젠가였나, 요모조모 하나하나 '네가 뭘 하고 내가 뭘 하고' 하며 수지타산 따져본 적도 있는데, 마냥내가 이길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그냥 우리는 서로 흐린 눈 스킬을 강화하기로 했다. 그럼 좀더 화목한 우리가 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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