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과연 '지금'처럼, ‘이렇게 ’ 살아갈 수 있을까?
내게 『말리의 일곱 개의 달』은, 사후세계를 담은 판타지로맨스 소설이었다.
우선, 한 나라의 역사 소설이라기엔, 사실 이런 일들은 비단 스리랑카에서만 일어난 일이 아니므로, 나는 읽으면서 오히려 책의 세계관이라고 느껴졌다. 그러니 가깝게 느껴지지 않는 나라의 얘기라고 해서 멀게 느끼지 않았음 좋겠다. 우리는 심각한 현실이라고 느껴지는 순간, 그 이야기를 피하려고 하니 말이다. 일제시대의 비극이나 419, 518의 컨텐츠를 의도적으로 피하는 나조차도 심지어 앞장에 있는 축약된 인물 설명과 지도를 볼때면, 마치 나니아 연대기를 같은 느낌이었다. 사건이 가볍다는 얘기가 아니다. 첫장을 펼치는데 있어, 독서 이상의 그 어떤 용기도 필요없다는 뜻이다.
책 끝 부분에서야 비로소 자신이 왜 죽은지 알게되는 말리는, 사진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거침없고 (그렇다고 마냥 선하지 않은) 지극히 인간적인 사진사다. 달이 7번 지기전까지, 그는 빛으로 향할 수 있는 ‘선택’을 할 수 있는데 그 전까지 사랑했던 딜런을 좇아다니거나 자신의 숨겨져있는 필름을 찾기 위해, 그리고 복수를 하기위해 마지막까지 선택을 미룬다.
그 과정 중, 복수를 돕는 세나와 이에 대립하는, 빛으로의 인도를 돕는 라니가 있다. 이를 선과 악이라고 단순히 치부하기엔 무리가 있다. 사후의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선택이니까.
죽은 뒤 영혼으로 중간계를 누비며, 살아있는 사람의 인생에 영향을 줄수 있다면 (예컨대 하고 싶은 말을 한다던가, 꿈에 나온다던가), 지극히소수의 사람들만이 모든 것을 잊고 다시 삶을 시작하게 되는 빛으로 향할 것이라 확신한다. 복수는 뜨겁고 매케하며, 그야말로 자극적이니 말이다.
한 나라에서 이뤄지는 민족 또는 이념적 차이로 내전이 이뤄지는 상황속에서 국가를 향한 개인의 투쟁은 언제나 ‘달걀로 바위 치기’ 같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민주주의가 제대로 자리잡기 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남산아래나 어두운 곳으로 끌려갔으며 그 속에서 많은 피가 흘렀는지 안다.
그 속사정을 조금더 면면히 들여다보면 결국 죄다 사람 대 사람으로 귀결되기 마련이다. 말리의 일곱개의 달 안에서 처럼, 정부의 지시를 받지만 개인의 신념으로 무고한 사람을 풀어주는 공무원이나, 자식의 사랑을 막기 위해 폭력을 일삼고 기어코 죽이는 사람까지, 결국은 다 개인의 일인 거다.
그러므로, 한사람 한사람은 본인이 어떻게 살아갈지 판단해야하고 결정해야한다. 그리고 후에, 죽어서 살아있던 생명을 다시 만난다는게 확실하단 가정아래, 지금 이대로 살아도 될지 돌아볼 일이다.
최근 최재천 교수님의 일말에 양심을 지키는 일이, 삶을 어떻게 바꾸는지에 대한 영상을 보았다. 사실 큰게 아니어도, 예컨대 단식이나 공성농성을 해서 노동조건을 바꾸도록 시위한다거나, 혹은 펫샵에 공급하는 강아지 공장에 1000마리를 다 구조하는 것. 그렇게 거창한 것이 아니어도.
노동조건이 지켜지지 않는 회사가 개선될 때까지 불매하거나, 강아지를 펫샵에서 사지 않고 이런 얘기를 공유하는 것. 그것만으로도 개인의 양심을 지키는 일, 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이 왜, 맨부커를 받았는지 알게된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개인-개인, 개인-국가, 민족-민족, 국가-국가를 넘어서 기어코 인간-환경까지 아우르는, 하지만 그것조차도 무엇이 옳다고 주입하는 방식이 아니라 그저 서술하는 방식이기에, 5시간 만에 후루룩 읽은 것 치곤 마음 찡한 여운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