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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똥이애비 May 17. 2024

어쩌다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모두가 만족하는 교회 생활"

  난 끈질기게도 교회에 다니지 않았다. 교희의 말을 빌리지면, 하느님이 나를 교회로 인도하지 않으셨다. 아니, 내가 그를 애써 외면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온갖 기독교의 전도에서 뱀처럼 빠져나갔다. 어릴 적 친구를 따라 동네의 작은 교회에 몇 번 다녔다. 선물도 주고 과자도 줬기 때문이다. 하지만 낯설고 어색한 환경 때문에 금방 그만두었다. 고등학교 때는 뺑뺑이로 간 학교가 기독교 고등학교였다. 즉, 미션스쿨을 아무나 들어가게 된 것이다. 이 학교에선 아침 조회시간에 한 명씩 나와 기도를 해야 했으며, 수요일 아침엔 전교생이 강당에 모여 목사님 말씀을 들어야 했다. 시간표 중에 기독교 수업이 일주일에 한 시간씩 있었고, 부활절이나 성탄절 등의 행사가 있으면 이 학교를 세운 대형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려야 했다. 내 친구는 집안이 신실한 불교집안이라 손목에 염주를 차고 학교에 다녔는데도, 선생님과 목사들은 그에게 기도를 올리도록 강요했다. 이러한 문제가 시발점이 되어 종교 자유라는 명목으로 학생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다. 나는 이러한 상황에도 그저 학교에서 시키는 대로 다 했다. 다 했음에도 기독교인이 되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그냥 주기도문을 달달 외울 수 있는 일반인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해 버렸다.


  군대에 들어갔다. 신병 교육을 받으면서 주말이면 종교 시간이 있었다. 기독교, 천주교, 불교 중 선택해야 했다. 물론, 아무 종교가 없는 사람들은 종교 활동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함께 교육을 받는 교육생들 대부분이 교회로 가서 나도 엉겁결에 따라갔다. 교회 예배는 익숙해서 아무런 문제가 될 게 없었고, 군인들이 제일 좋아한다는 초코파이도 받았다. 군대에서 먹 초코파이의 맛은 절대 잊을 수 없다. 게다가 찬양으로 기독교 밴드가 나와서 공연을 했는데, 군대에서 거의 볼 수 없는 치마 입은 예쁜 처자(?)들이 나와 기타와 피아노를 치고 노래를 불렀다. 우리 교육생들은 마치 연예인을 보듯이 환호하고 찬송가로 소리를 질렀다. 그렇게 난 신병 교육을 받는 내내 주말이면 기독교 종교 활동만 다녔다. 그러나 신병 교육이 끝나고 자대 배치를 받고서는 교회는 또 눈앞에서 사라져 있었다.


  결혼을 했다. 아내는 기독교인이 아니었지만, 장모님은 아주 신실한 교회인이셨다. 장모님의 설득으로 연애 때도 특별한 날이면 교회에서 데이트를 했다. 장모님은 교회에 아는 분들이 많았다. 심지어 기독교도 아님에도 우리 결혼식에서 주례를 목사님이 하셨다. 이 또한 장모님의 영향이다. 결혼을 하고 나서는 코로나에 육아로 인해 교회 문 앞도 쳐다보지 못했다. 장모님도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었기에 교회에 오라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하지만 본인은 수요일이고, 금요일이고, 주일이고 계속 가셨다. 옆에서 보면 집보다 교회를 더 자주 가시는 것처럼 느껴졌다. 사실 신기했다. 내 주변 가까운 사이에서 이렇게 독실한 기독교인은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나도 이러니 저러니 교회물 좀 마셔보긴 했는데, 저렇게 맹목적 찬양을 할 수 있는 수준이면 도대체 어떠한 부르심을 받은 건지 상상 조차 할 수 없었다. 오히려 이렇게 빠져들 수 있다는 게 부러울 정도였다.



  아이가 다섯 살이 되었다. 아이도 장모님의 영향을 받은 건지 어느 날 교회에 가보고 싶다고 말했다. 코로나도 끝났고, 아이도 어느 정도 컸으니 교회에 가봐도 좋을 거라 생각했다. 교회는 지역 커뮤니티이기도 하고 여러 활동을 통해 사람과의 관계를 배울 수 있을 거라 여겼다. 특히나 아내가 비슷한 또래들끼리 영어로 예배를 드리는 유아반이 있다고 하여, 주말에도 아이를 잠시 한 시간 정도 공짜(?)로 맡겨놓을 수 있다는 희망찬 바람도 있었다. 이런 꿀맛 같은 시간에 물론 부모들은 예배를 드리러 가야 했다. 주말에 아이와 잠시 떨어져서 목사님의 뜻깊은 말씀을 듣고, 성경을 통해 역사를 배우니 귀에 쏙쏙 박힐 정도로 재미있었다. 나이를 먹고 몸이 약해짐과 동시에 마음도 약해지고 있었는데, 메마른 가슴에 성스러운 물줄기가 흩뿌려지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자발적으로 헌금도 하게 되었다. 결국 공짜는 아니었던 셈이다. 예배 시간이 짧게만 느껴졌는데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아이도 재밌었다며 수업시간에 받은 선물들을 내게 자랑스럽게 보여주었다. 아이가 재미있는 활동들을 하면 나를 보자마자 꼭 하는 말이 있다.


"아빠, 나 다음에도 또 할래."


교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보니 일요일만 되면 아이와 함께 교회를 가는 게 일상이 되었고, 벌써 한 달째 다니게 되었다. 장모님은 입이 귀에 걸리셨다. 본인이 사위와 딸 그리고 손녀딸까지 모두 전도를 했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셋 모두 마음속 깊이 하느님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아이가 사람들과 활동하는 것을 즐거워하기 때문에, 아이의 성장에 도움이 될 거라 여기기 때문에, 주말에다 아이와 잠시 떨어져서 혼자 여유롭게 생각할 시간이 주어지기 때문에, 교회 식당의 점심밥 값이 싸기 때문에, 나이를 먹어서도 누군가 바르고 옳은 소리를 해주기 때문에, 성경을 통해 역사를 배울 수 있기 때문에, 찬양대가 불러주는 찬송가가 듣기 좋기 때문에, 교회에 있는 시간이 힐링이 되고 마음을 촉촉이 적셔주기 때문에 교회에 다니고 있을 뿐이었다. 이 정도면 하느님이 내게 온 것이 아니라, 교회가 내게 온 것이라 생각해도 될 정도였다. 어쨌든 장모님도 만족하고, 우리 가족도 모두 만족하는 교회 생활을 당분간은 이어갈 수 있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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