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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테시아 Feb 02. 2023

찰나의 부서짐

필링 인 터키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들은 모두 부서질 운명이었나 보다.


이틀 동안 땅으로 추락하던 빗방울이 지상의 그 무엇과 만나

일제히 부서지고 흔적 없이 투명하게 사라져 버렸다.

툭, 툭, 제각각의 소리 내며 멋쩍게 창문을 두드리는가 싶더니,

창문을 열자, 어느 순간에 흔적을 감추고 소멸해 버렸다.


일 년 365일 해를 보지 않고도 살 수 있는 음지 생물체,

나.


햇볕이 쨍한 아침의 출근길은 그야말로 불쾌하기 그지없었다.

비바람이 몰아쳐 허벅지까지 비에 젖어도,

단지 해가 없어서 기분 좋은 하루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여행을 떠나오면서는 상황이 정반대가 되어 버렸다.

배낭이며 신발, 옷을 적시는 비가 여간 성가신 존재가 아니었다.

습기 가득한 차 안의 공기며, 게스트하우스의 눅눅한 침대며,

추스릴 수 없는 감정의 분열 따위가 타의적으로 걸음을 멈추게 만들었다.

그에 반해, 따사로운 햇살은 그야말로 여행을 여행답게 풍요롭고 가볍게 했다.

가고 싶은 곳은 어디로든 갈 수 있게 만들었고,

쉬고 싶을 때 어디서나 지친 다리를 쉬게도 했다.

굳이 식당을 찾아 들어가지 않고 노점에서 가볍게 한 끼 밥을 먹을 수도 있었다.

점심을 먹고 졸리면 어느 벤치든 누워서 작은 잠을 잘 수도 있었다.


지하철만 타고 다녔지만, 여행에서 돌아온 후에는

버스를 이용하는 횟수가 늘어났다.

덜컹거리는 버스 안에 부서지듯 들어오는 햇살 때문이다.

마치 광합성을 하는 식물처럼 들어오는 햇살 쪽으로 몸이 쏠려 있는 나를 발견한다.


여행은 나를 광합성하는 식물로 만들어 버렸다.


찰나의 부서짐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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