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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희영기행작가 Nov 11. 2023

[영남알프스 전설따라] 영축산 통도사

비보풍수 '호혈석' 설화 얽힌 풍광 뛰어난 수도처

백운암에서 바라본 통도사

영축산(靈鷲山)은 통도사를 품은 산으로 석가모니가 설법하던 인도 마가다국 왕사성에 있는 영축산의 모습과 통하므로 그곳에서부터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통도사는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에 위치해 있으며 석가모니의 진신사리(眞身舍利)가 안치된 적멸보궁(寂滅寶宮)이 있어 불보(佛寶)사찰로 불린다. 

 통도사에는 현재 본 절인 통도사를 비롯해 17개의 암자가 있는데, 통도사를 중심으로 서·북산 쪽과 남쪽 그리고 산문 밖으로 나뉘어 있다. 이 중 서·북산 쪽 암자는 9개(백운암. 비로암, 극락암, 반야암, 자장암, 금수암, 서축암, 안양암, 수도암)가 있으며, 남쪽 암자 6개(보타암. 취운암. 서운암. 사명암. 옥련암. 백련암)가 있고, 산문 밖 암자로는 관음암과 축서암 2개로, 통도사 산 내 암자는 모두 17개인 셈이다. 이들 암자 중 백운암을 제외하고는 모두 차가 다닐 수 있는 도로가 연결돼 있어 쉽게 이동할 수 있다.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영축산에 있는 사찰 통도사

# 통도사 내 봉정암이라 불리는 백운암


백운암은 영축산 자락 715m쯤에 위치해 있어 통도사 내 봉정암(설악산에 있는 암자로 남한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암자)이라 불릴 정도로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 그야말로 바위 위에 자리 잡고 있다. 영축산 8부 능선 높은 산 중에 있다 보니 찾는 이도 드물 뿐만 아니라 수도처로 유명하다. 신라 진성여왕 6년(892년)에 조일대사(朝日大師)가 창건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자세한 내력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주차장에서 불과 800m가량 되는 거리지만 경사가 매우 심한 데다 길도 거칠다. 다행히 나무로 만든 계단과 쉼터가 군데군데 조성돼 있어 중간중간 쉬었다 가기를 반복하더라도 1시간 30분이면 절 마당 입구에 도착할 수 있다.


 옛날 호랑이가 많을 때 통도사까지 내려와 사람을 물어가는 호환이 발생해 문제가 됐다고 한다. 이에 얽힌 재미난 전설이 다음과 같이 전해지고 있다. 옛날 백운암에는 젊고 잘 생기고 목소리가 좋은 스님이 수행 생활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훌륭한 강백(講伯·경론을 가르치는 강사에 대한 존칭)이 되기 위해 불철주야 불경 공부만 열심히 하며 수행에 몰두하고 있었다. 장차 통도사의 강백이 돼 스님들을 가르치고자 하는 꿈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백운암은 인적이 드문 곳이라 스님의 친구라곤 오르지 날아다니는 까치, 까마귀, 산새, 다람쥐뿐이었다. 스님이 암자 문을 활짝 열고 정갈한 목소리로 목탁을 치며 불경을 외우는 날이 있었다. 스님의 목탁소리에 반해 가까이 있는 산새들은 말할 것도 없으며, 영축산 호랑이도 덩달아 춤을 추었다고 할 정도로 스님의 염불소리는 산천을 울려 아래 본 절 통도사까지 은은하게 울려 퍼질 정도였다고 한다. 

영축산 백운암 산문

# 연모하던 스님 혼인 거절에 한 품은 채 눈 감아


어느 날 인적이 끊긴 야심한 시간에 스님이 불경을 외우고 있을 무렵, 암자 앞에 인기척이 나며 나직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스님! 스님!" 의아하게 생각하며 문을 연 스님 앞에 한 처녀가 나물 바구니를 가지고 서 있었다. 스님은 조심스럽게 “이 야심한 밤에 무슨 일로 이곳에 왔으며, 어디에 사는 누구냐"고 물었다. 처녀는 “이 아래 동네 통도사 근처에 사는 처녀이온데 친구들과 나물 캐러 나왔다가 그만 길을 잃고 헤매다가 백운암으로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날은 저물고 호랑이가 출몰하는 밤길이 위험하므로 처녀는 하룻밤 묵어갈 것을 스님에게 청했다. 암자의 방이 하나뿐인지라 스님 입장에서는 매우 난처하였다. 어쩔 수 없이 스님은 아랫목을 처녀에게 내주고 윗목에 정좌(正坐)한 채 밤새 경전을 읽었다. 스님이 불경을 읽는 낭랑한 목소리는 처녀의 가슴을 울렁거리게 만들었다. 스님의 단아한 모습과 듣기 좋은 염불 소리에 반한 처녀는 눈은 지그시 감았지만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처녀는 날이 밝자 백운암을 떠나 집으로 무사히 돌아왔다. 그러나 마음속에는 언제나 백운암 스님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처녀는 스님을 연모하는 마음이 날이 갈수록 깊어만 갔다. 모든 것이 싫어졌고 하물며 일어설 수도 없을 정도로 몸은 야위어만 갔다. 처녀가 상사병에 걸리게 된 것이었다. 가정환경도 넉넉해 뭐 하나 부족한 것 없이 자란 처녀였다. 부모는 병에 좋다는 약을 다 써 보았으나 백약이 무효였고, 걱정은 태산과 같았다. 산해진미 중에서도 맛 좋은 음식을 골라 줘도 거들도 보지 않으며, 물 한 모금조차 넘기지 않았다. 또한 좋은 혼처 자리가 나와도 마다하고 식음을 전폐하며 끙끙 앓는 딸의 심정을 알지 못한 처녀의 부모는 안타깝기만 했다.


 어느 날, 어머니가 병석의 딸을 돌보다 봄에 나물을 캐러 갔다가 길을 잃었을 때 백운암에서 만났던 젊은 스님이 눈앞에 아른거려 가슴이 답답해 견딜 수가 없다는 말을 들었다. 다음날 아침 처녀의 부모는 자식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백운암의 스님을 찾아갔다. 자초지종을 이야기한 부모는 죽어가는 딸의 생명을 구해 줄 것을 빌며 애걸복걸 했다. 또한 스님에게 수도 생활을 안 해도 한평생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넉넉한 살림을 차려 줄 테니 우리 딸과 혼인해 줄 것을 애원했다. 그러나 젊은 스님의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그 후 처녀는 스님을 잊지 못하고 시름시름 앓더니 한(恨)을 품은 채 눈을 감았고, 한이 맺힌 처녀는 영축산 호랑이가 됐다. 

 스님은 흔들림 없이 정진에 정진을 거듭한 끝에 서원(誓願·소원하는 것을 맹세하고 이루어지기를 기원하는 일)하던 통도사 강백이 됐다. 여러 학승들에게 경전을 가르치던 첫날, 강원에 갑자기 거센 바람이 일며 호랑이 울음소리가 산천을 진동하며 들려왔다. 황소만큼 큰 호랑이가 전각 지붕을 넘나들며 어흥! 하고 포효하며 문을 할퀴며 위협을 했다. 호랑이의 이러한 행동을 지켜보던 대중들과 학승은 스님 중 누군가가 호랑이와 무슨 인연이 있을 거라고 웅성거렸다. 

통도사 응진전 옆 호혈석

# 스님들 수시로 호환…풍수지리로 기죽여


결국 대중들과 스님들 각자 가사(架裟·저고리)를 벗어 밖으로 던져 그 연이 누구와 이어졌나를 알아보기로 했다. 모여 있던 모든 사람들의 가사를 벗어 하나씩 밖으로 던졌으나 호랑이는 본체만체하더니 마지막 강백 스님의 저고리를 던지자 단숨에 스님의 저고리를 낚아채는 것이 아닌가! 이를 지켜본 강백 스님은 주저 없이 속세의 인연인가 보다 하고 호랑이 앞으로 나갔다. 호랑이는 기다렸다는 듯 스님을 입으로 덥석 물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다음날 통도사의 모든 스님들은 강백 스님을 찾아 온 산을 헤맸다. 스님은 백운암 옆 산등성이 큰 바위 아래에서 죽은 채로 발견됐다. 죽은 스님을 자세히 살펴보니 남성의 중요한 부분이 사라지고 없었다고 한다. 이런 일이 있은 뒤로부터 수시로 통도사 스님들이 호환을 당하게 됐고, 시신을 찾고 보니 강백스님처럼 남성의 상징인 중요한 부분만 없어졌다고 한다. 


 이후로 통도사 스님들은 호랑이 기운을 없애려고 호랑이 핏빛을 띤 바위를 경내 두 곳에 뒀는데, 비보(裨補)를 한 셈이다. (비보(裨補) : 풍수지리의 한 개념으로 모자라는 곳을 도와서 채워 준다는 뜻이다. 어떤 장소든지 100% 완전한 명당은 없기 때문에 터가 너무 강한 곳은 석탑이나 석상(石像) 같은 것을 세워서 눌러 주고, 약한 곳은 땅을 돋우거나 나무를 심든가 해서 이를 보강하는 방법이다. 또한 인공적으로 연못을 파는 것도 이러한 비보풍수(裨補風水)의 한 가지 방법에 속한다.) 바로 호혈석이다. 즉 호랑이의 기를 누르기 위해, 마치 강백 스님의 피가 묻은 것처럼 붉게 보이는 바위를 통도사 내 응진전 옆과 극락전 옆 북쪽에 호혈석(虎血石), 또는 호석(虎石)을 경내 두 곳에 배치했고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또한 다음과 같은 이야기도 전해져 내려온다.


# 스님의 염불소리에 영축산 호랑이도 춤을 추다.


옛날 통도사를 비롯한 부근 암자에는 잘생기고 초성(楚聲:목소리가 좋은)이 좋은 스님이 수행자 생활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지금이야 통도사를 비롯한 말사(암자)에는 좋은 시설로 스님들이 수행자 생활을 하기에 불편한 점이 별로 없지만 당시 부처님을 모시는 암자만이 있는 곳에서 생활을 한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경을 읽는 시간 암자 문을 활짝 열고 정갈한 목소리로 목탁을 치며 불경을 외우는 때이면 영축산 호랑이도 서로 춤을 추었다고 한다. 


어느 날 백운암 스님의 염불소리를 듣던 영축산 암컷호랑이가 스님의 미모에 반해 상사병에 걸리게 되었다. 암컷호랑이는 어찌하면 저 스님과 인연을 맺을 수가 있을까? 하고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였지만 묘한 비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든 어느 날 우연히 산신령을 만나 자신의 하소연을 털어 놓았다. 어찌하면 저 백운암에 수행생활을 하고 있는 스님을 인연으로 삼아 같이 살 수가 없을까 여쭈어 보았다. 산신령이 하는 말 “너는(암컷호랑이) 미물에 불과 한데 어찌하여 인간 세상에 사는 사람과 어울릴 수가 있겠노? 하물며 스님은 부처님을 모시는 부처님의 제자가 아닌가!” 하였다.  


# 스님 강백이 되던 첫날 호환을 당하다.


스님은 흔들림 없이 정진(精進)에 정진을 거듭한 끝에 서원(誓願:소원하는 것을 맹세하고 이루어지기를 기원하는 일)하던 통도사 강백이 되었다. 여러 학승들에게 경전을 가르치던 첫날! 강원에 갑자기 호랑이 울음소리가 산천을 진동하며 들려왔다. 큰 호랑이가 전각 지붕을 넘나들며 포효하고 문을 할퀴며 위협을 했다. 호랑이의 행동을 지켜보던 대중들과 학승은 스님 중 누군가가 호랑이와 무슨 인연이 있을 거라는 웅성거렸다. 그러던 찰나 갑자가 호드락바람(회오리바람의 방언)이 불더니 갑자기 방안에 불이 꺼졌고, 다시 불을 켜보니 강백이 된 스님이 없어진 것이었다. 날이 밝아 통도사 스님이 총동원되어 영축산 곳곳을 찾아보니 백운암 위 채이봉 아래 죽어있었다.


□ 참고문헌 

* 통도사 승보박물관(영축총림 통도사)

* 이글은 필자가 30여년전 통도사 비로암에서 백운암으로 산행도중 한 스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작성한 글임.  

진희영 산악인·기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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