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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작가 Dec 29. 2023

방송작가의 퇴사기, 세 번째

나는 잡동사니였을  뿐...

수면 시간이 엉망이 됐다. 잠을 쉽게 이루지 못하고, 잠이 들어도 계속 깨고 자고 가 반복되었다. 아예 새벽 4시 언저리가 되면 깨어도 다시 잠이 오지 않았다. 그러면 불도 켜지 않고 가만히 누워있었다. 분노, 슬픔, 원망... 그야말로 부정의 기운들이 내게 쏟아졌다. 그 이른 시간에 누군가에게 내 마음을, 내 상태를 쏟아붓고 싶었다. 그러나 돌아보면, 아무도 없었다.

퇴사 통보를 받은 지 닷새째 새벽, 나는 여전히 누워서 마음의 소리들과 더불어 누워있었다. 갑자기 숨이 턱턱 막혀 오기 시작했다. 안 되겠다 싶어 온 집안 불을 다 켰다. 옷장 문을 활짝 열었다. 어차피 이제 입고 나갈 때도 없는데 이게 다 무슨 소용이람. 옷장 안에 있던 옷들을 다 끄집어냈다. 옷을 좋아하긴 했지만, 갖고 있는 옷이 이렇게 많을 거라 생각도 못했다. 산 거, 받은 거, 바꾼 거, 아낀 거... 제일 황당한 건 기억에 없는 옷들이었다. 샀는지조차도 몰랐던 옷, 없는 줄 알고 다시 샀더니 구석에서 기어 나온 옷... 입을 일이 없다 생각하니 과감해지기 시작했고 어느새 처리할 옷들이 수북해졌다.  

다음은 책방이다. 학교 다닐 때 금서라 아껴 읽었던 사회 과학책들, 세로줄로 된 옛 책들, 방송 자료들.. 다시는 읽지 않을 거라 생각하니 버릴 책들이 쌓여갔다.

억지로 잠을 청하느니 온 집안을 헤집으며 매일매일 정리를 하는 게 훨씬 나았다. 일단 잡념이 들지 않았다. 그저 내 앞에 놓인 물건을 어떻게 할지만 결정하면 됐다. 버릴 것인가, 가져갈 것인가. 내 것이 아니라면 필요한 이에게 줄 것인가, 그냥 버릴 것인가.

회사 경영진은 메인 작가들을 내보내면서 이렇게 말했다. 정규직뿐만 아니라 비정규직도 내보내는 것으로 회사가 얼마나 구조조정을 단호하게 하려는 지 상징적인 모습을 보여주려 했다. 그건 그들의 이야기 일 뿐이다. 그들은 메인 작가들을 내보낼 것인가, 같이 갈 것인가를 두고 고민도 하지 않고 바로 버리기로 결정했다. 구조조정의 의지를 보여준다고 했지만, 아무 문제없는 프로그램의 메인 작가를 내보내는 일은 긴 방송 생활에서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다르게 말하면, 프로그램에서 메인 작가는 없어도 그만인 거라 생각했다는 것이겠지. 이미 제작 시스템도 자리 잡았는데 작가료도 높고, 나이 많은 작가가 굳이 필요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게지. 아무런 보호막도 없는 프리랜서에겐 ‘내 회사’는 상상 속에만 존재했던 것이다.  

버리려고 내놓은 옷, 책, 온갖 잡동사니처럼 그들은 하루아침에 나를 ‘쓸모없는 존재’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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