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작가의 퇴사기, 여섯 번째
내가 회사를 버렸다.
그날, 10년 간 했던 그대로 했다. 내가 맡은 일도 다 했고, 생방송도 무사히 마쳤고, 방송 후 제작팀에서 열어준 송별회도 참석했고, 송별사도 짧게 했고, 제작팀과 더불어 저녁 식사도 했고, 심지어 저녁 식사 중간 다음 주 펑크를 낸 출연자 섭외도 하고, 집에 왔다. 12월 첫날이었다.
10년동안 다듬어진 일상이 깨졌다. 늦게까지 실컷 잠을 자리라 마음을 먹었지만, 5시 반이면 눈이 절로 떠졌다. 다시는 사회 뉴스를 보지 않으리라 결심했지만, 어느새 사건사고 기사를 보는 내가 있었다. 제일 힘든 건 오후 시간이었다. 원고를 쓰고, 후배들 원고를 검수해야 할 시간에 아무것도 할 게 없었다. 집에 처박혀 있었지만 어떠한 순간에도, 심지어 멀리 휴가를 떠나서도 챙겨봤던 방송을 퇴사 후 단 한 번도 보지 않았다. 아예 그 채널 자체를 보지 않았다. 인연이 아니다 싶은 사람들은 카톡과 라인에서 지우는 걸로 정리했다.
마음을 다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잊힐 수 있다는 두려움, 채 떨치지 못한 분노 등 부정의 기운이 엄습했다. 안 되겠다 싶다 싶어 약속을 매일매일 만들어댔다. 때론 뜻밖의 만남도 있었다. 딱히 친하다고 할 수 없는 지인들이 먼저 손을 내민 것이다. 공통점이 있었다. 다들 인생 선배들이었다. 나와 같은 상황을 봐왔고 겪었고 알고 있는 선배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흔들리는 나를 찬찬히 일으켜 세웠다.
“비슷한 일을 겪었던 사람들을 보면 처음엔 다들 분노에 휩싸여있지만, 몇 달이 지나면 편안해진다. 왜? 내 길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 내 길이 되고, 내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내 사람이 되어 다가오면서 자신의 길을 찾게 된다.” “정점에 올랐다가 서서히 추락해서 소리 소문 없이 잊힌 게 아니라, 정점에서 그만뒀으니 아직 내려갈 때가 아니다.”
상처는 치료되지만, 흉터는 남는다. 흉터자국을 만지면서 다쳤을 때의 상황도 떠올리지만,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지란 마음이 더 강하다. 상처를 더 후벼 파기보단 슬슬 약을 발라줘야겠다 싶었다. 수첩에 지금 할 일, 해야 할 일, 하고 싶은 일을 써 내려간다. 무엇보다 내 마음을 바꾸기로 한다. 한 선배의 말처럼 회사가 나를 버린 게 아니라 내가 회사를 버린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