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했다." 한 달마다 돌아오는 진급 시험을 끝내고 학원 문을 나서는 순간, 뱉은 한 마디.
"수업 중 한국어 절대 쓰지 마세요." 한국인 선생님과의 4개월 수업을 마치고, 드디어 원어민 회화반으로 올라간다. 4단계로 이뤄진 원어민 회화반의 첫 단계다. 첫 수업부터 일본어가 쏟아진다. 나를 비롯한 수강생들의 흔들리는 눈동자. 수업 내용은 이전에 배운 것이라 이해는 되는데 머리와 입이 따로 논다. 분명 배웠는데 단어가 생각이 안 나고, 문장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한자와 가타카나가 나오면 목소리마저 작아진다. 한 시간 반 수업이 길다.
"파파고 쓰지 마세요." 숙제를 그득 내주면서 선생님이 덧붙인다. 전에 있던 반보다 새롭게 배우는 학습량은 적은데, 잊어버려서 다시 예전 교재를 둘러보고 공부하느라 숙제 시간이 길어진다. 이 와중에 인터넷 영어 공부까지 신청했으니 주제 파악 못한 게 확실하다. 영어 공부하는데 이 문장이 일본어로 뭐더라.. 이러다 일본어, 영어 둘 다 망할라.
"제가 한국인이라서.." 일본 간 김에 배운 것 좀 써먹으려 한다. 그러나 시작부터 막힌다. 마트에서 간단한 문장으로 말했더니 상대방은 길게 말한다. 결국 일본어 잘 못한다고 이실직고. 간판은 왜 이리 가타카나가 많은 건지. 결국 입 다물기로 한다.
"ハンカチ(한카치)가 왜 손수건이냐고" 한국 선생님들은 시험 직전 어떻게 나올지 대충 이야기해 준다. 문법과 작문으로 이뤄진 100퍼센트 필기시험이었다. 그러나 원어민 회화반은 다르다. 문법 필기 30퍼센트와 구술 70퍼센트다. 게다가 구술시험은 옆반 선생님에게 치른다. 시험 전 날, 외워지지 않는 가타카나를 붙들며 혼자 엄청 투덜댄다. 구술시험 대비해 큰 소리로 말하기 연습도 해보지만, 두근거림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 동사와 형용사를 과거, 과거부정형으로 바꿔주세요." 필기시험은 그럭저럭 할 만하다, 구술시험 시작도 괜찮다... 고 생각하는 순간 큰 벽이 다가온다. 지난 주말 뭐 했냐는 질문에서 시작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 머릿속이 점점 하얗게 된다. 연신 긴장된다고 말한다. "てもいいです。 てはいけません。"으로 문장을 만들라고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도대체 왜?"시험 결과는 이틀 후에 나온다. 결과를 바로 알 수 없으니 더 초조해진다. 진급 못하면 그낭 재수강하면 되는 거지라고 생각하면서도 마음이 잡히지 않는다. 내 돈 주고 학원 다니면서 내가 왜 괴로워야 하는 건지, 일본어 공부 하나 하기도 벅찬데 주제파악 못하고 왜 영어까지 시작한 건지, 머리도 나쁜데 왜 공부는 시작한 건지...
6번 진급시험 모두 한 번에 통과했는데 이제 이 기록은 여기까지인가. 시험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엄청난 두통이 찾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