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은 H2O인가?>로 생각해 보기
*이 글은 특히나 제 그릇을 벗어나는 이야기를 많이 담고 있습니다. 이 글은 마냥 독자에게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라기보다 개인적으로 이해한 내용을 메모처럼(, 그러나 가급적 가독성 있게) 한번 정리해 보는 것, 그리고 혹 제가 이해한 내용 중에 발견되는 오류를 교정해 주실 분이 계시다면 가르침을 부탁드리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해 주세요.
*구문문법 수업에서 구문문법도 광의의 생성문법에 포함된다고 배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특히 Fillmore류 구문문법만큼은?) 그래서 그 수업에서는 구문문법과 대비되는 촘스키언 통사론을 '생성문법'이 아니라 '주류 생성문법(Mainstream Generative Grammar)'이라고 일컬었습니다. 본문에서는 촘스키언 통사론을 일컫는 이름으로 주로 '주류변형생성문법'이라는 표현을 쓰려고 하는데, 제목은 가독성을 위해 그냥 '생성문법'이라고만 표현했음을 밝힙니다.
어제 이 글을 쓰고서, 마지막에 언급했던 하스펠마트(Martin Haspelmath)의 블로그 글 <We are all constructionists>을 한번 다시 읽어 보았다. 그랬더니 전에는 보이지 않던 재미있는 내용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 내용을 어제 올린 글에 조금씩 정리해서 기워넣듯이 수정추가하다 보니 배보다 배꼽이 더 커져서, 그냥 새로 글을 하나 올리기로 했다.
하스펠마트(Haspelmath)는 언어학계가 몇몇 진영으로 분열되어 있는 현실을 못마땅히 여긴다. 이름은 같은 언어학자라 해도, 촘스키언 언어학자는 촘스키언 학회에만, 인지언어학 진영의 언어학자는 인지언어학 학회에만 참석하는 등 소통 단절 위험을 초래하는 관습이 언어학계에 있다는 것이다.
그는 그래서 일종의 언어학계 통합을 위한 노력을 하곤 한다. 하스펠마트가 'lexical', 'morpheme' 등 '불필요하게 너무 여러 가지 뜻으로 쓰이는' 언어학 용어와 그것이 나타내는 개념의 구획을 이론 프레임워크와 맥락에 구애받지 않도록 통일하고자 하는 시도를 하는 것은 그러한 노력의 일환일 것이다.
언어학계의 분열을 해소해 보려는 그의 노력은 종종 그런 수준에서 그치지 않고, 촘스키언 진영과 안티-촘스키언 진영이 각각 내세우는 이론이 실은 '이미 본질적으로 서로 같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데에 이른다.
내가 대학에서 배웠던 바에 따르면 촘스키언 언어학과 촘스키의 주장을 따르지 않는 수많은 언어학 이론들은 서로 너무 달라서, 한 쪽 진영이 자기들 이론의 뿌리에 불변의 전제로서 가지고 있는 신념을 다른 한 쪽에서는 터무니없는 맹신이라고 비판하고 있을 정도이며, 전문 언어학자라고 해도 반대 진영의 연구 내용을 이해하려면 따로 신경을 써서 기초적인 사항들을 다시 공부해야 할 만큼 각 이론 진영마다 고유한 특징이 쌓여 있는데도, 하스펠마트는 '그런 차이는 다 표면적이고 부수적인 것일 뿐이고, 우리 언어학자들이 말하는 내용의 본질은 결국 서로 같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의 주장을 따르자면, 언어학계가 통합을 하려면 각 진영에서 뭔가를 조금씩 포기하고 양보해야 하는 그런 상황이 아니고, 잘 뜯어보면 결국 서로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일 따름이므로, 그냥 언어학 이론을 서술하는 공통의 (메타)언어를 잘 확립해서 겉보기의(notational한) 오해를 해소하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하스펠마트는 2020년과 2021년에 그런 주장을 담아 <We are all structuralists>와 <We are all constructionists>를 써서 Diversity Linguistics Comment 블로그에 업로드하였는데, 이 글에서는 그 중 후자에 관해 이야기해 보겠다.
개인적으로 그의 이러한 주장을 듣다 보면 기독교의 '교회 일치 운동(에큐메니컬ecumenical 운동)'이 떠오른다. 기독교는 지금 가톨릭, 정교회, 수많은 종류의 개신교 교단, 그 밖의 수많은 교파로 나뉘어 있다. 그들 교파의 교리 사이에는 수많은 차이가 있다. 그러한 상황에서 기독교를 다시 하나로 만들려면 저마다 조금씩 자기 교리를 수정하거나 남의 교리를 수용해야 할 것이다. 당연하게도 각 교파의 보수적인 집단에서는 교회 일치 운동을 결코 곱게 바라보지 않는다.
하스펠마트의 주장에 대해서도 촘스키언 진영이든 반-촘스키언 진영이든 그와 비슷한 반응이 나올 것을 예측할 수 있다. 모르긴 몰라도 어느 이론 프레임워크에 깊이 뿌리내린 언어학자라면 대번에 '우리 이론이 저놈들 이론이랑 똑같은 얘기라고? 어어디 유사언어학을 우리 정통 언어학에 갖다 대느냐!'라며 반발하지 않을까?
표현이 그만큼 격정적이지는 않았지만, 역시 <We are all constructionists>의 댓글란에서 촘스키의 제자 David Pesetsky가 하스펠마트에게 반론을 제기하는 장면을 목격할 수 있었다. (아쉽게도 구문문법 진영의 반응은 아직 확인한 바가 없다.)
하스펠마트는 본문에서 구문문법의 핵심 이념을 '문법 이론에는 형태의 선조적 결합 말고도 다른 메커니즘이 필요하다'라는 것으로 정의한 뒤, '그러한 맥락에서 '비-구문문법 진영'에서 zero 형태소나 변형규칙을 상정하는 건 '구문문법 진영'에서 구문을 상정하는 것과 그냥 notation이 다른 것일 뿐 본질적으로는 차이가 없다'라고 주장한다.
"The essence of constructionism is the recognition that “we need additional mechanisms (constructions) that go beyond the basic mechanisms of morph combination”, so any zero element is a constructional feature. (And for that matter, any transformational rule is constructional, too, because transformations are additional mechanisms.) Zero elements and constructional schemas (as in Booij 2010) are notationally different, but there does not seem to be any difference in substance."
"... “underlying structures” and “derivational rules” are just one way of notating constructional patterns. All descriptions need abstractness because grammatical patterns are not simplistic, and unless one thinks that the rule types are innate (see the first sentence of this paragraph), transformations are merely one way of describing the facts."
예를 들어 영어의 의문문과 같은 주어-조동사 도치 구문(Subject-Auxiliary Inversion)에 대해,
구문문법은 그런 구문이 통째로 언어에 존재한다고 보는 반면,
주류 변형생성문법에서는 의문을 나타내는 영형태의 보문소(complementizer)가 존재해서 그것이 조동사를 끌어당기므로 주어-조동사 도치가 일어난다는 이론을 상정하는데,
하스펠마트의 주장에 따르면 이것이 표면상, 표기 관습상으로만 서로 다른 이야기일 뿐 결국 내용의 본질은 같다는 것이다. (주어-조동사 도치 구문이라는 예시는 본문의 해당 부분에 명시적으로 등장한 것은 아니다.)
이런 주장에 대해 David Pesetsky가 댓글로 대략 아래와 같은 반론을 제기했다. (요약의 정확성에 주의)
'구문문법에서와 달리, 일반 원리로 설명할 수 없는 특이구문을 인정하는 건 생성문법에 있어서 하나의 패배와 같다. 생성문법 연구자들이 의문을 나타내는 제로 보문소를 상정하는 건 구문문법 진영이 아무렇지 않게 '이거 걍 구문임'하고 논의를 끝내는 것처럼 게으른 행동이 아니다. 의문을 나타내는 제로 보문소를 상정하면 주어-조동사 구문에서 다른 보문소들이나 다른 제로 형태소들과 유사한 특징이 나타난다는 사실까지 함께 설명(예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Positing a “zero question morpheme”, to focus on your second example, is not “constructional”, not a defeat — because it implicitly hypothesizes important generalizations concerning yes/no questions: that the properties of the proposed null morpheme will fall together with other known properties of complementizers, of heads that attract other heads to them, of null elements in general, of elements with focus-related semantics, and more."
"We are not all constructionists — nor should we be."
그러나 하스펠마트는 우선 구문문법 진영이라고 해서 모두 Fillmore(1988)처럼 idiosyncrasy라든가 별도로 구문을 설정하는 일의 필요성만 강조하는 게 아니고 Goldberg(1995)처럼 일반화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정서를 보이기도 한다는 점을 지적한 뒤에, (Pesetsky로부터 한 차례의 재반론을 받고서) 대략 아래와 같이 덧붙인다.
'주류 변형생성문법에서 제로와 변형을 상정하는 것은 정말로 구문문법의 접근과 통약 불가능한(incommensurable, 장하석 교수 번역으로는 '비정합적인') 것인가?
주어-조동사 도치를 일으키는 제로 보문소와 그것이 수반하는 여러 예측들은 정말 구문문법의 노테이션 프레임워크로는 도무지 번역할 수 없는 것인가?'
(맥락상 그게 가능하다는 의미 같은데, 아쉽게도 그런 번역을 당장 제시하지는 않는다.)
(아무튼 하스펠마트는 언어학계가 분열되어 있는 것이 실제로 이론 간에 소통불가능할 만큼의 비정합적 차이가 있기 때문이라기보다 겉으로 보기에 다른 표현 관습을 사용하기 때문일 뿐이라는 이야기를 하는 듯하다.)
"what matters is not so much how our predictions can be tested, but whether there are larger (“metatheoretical”) incommensurabilities – such that, for example, there is no way to formulate the “movement to COMP” idea (with all its predictions) within a constructional notational framework. That is not clear to me. If the frameworks are not merely (i) notational practices, (ii) communities, or (iii) ideologies, but if they embody claims about Human Language, it would be important to clarify what claims are made. I don’t get the impression that there is any clarity about this."
아쉽게도 여기에 대해 Pesetsky의 추가 반론이 따라붙지는 않았으므로 (사실 구문문법 연구자가 아닌 사람이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은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논쟁은 여기서 멈추었으나, 여기까지의 논쟁도 개인적으로 상당히 흥미롭게 읽었다. 하스펠마트가 incommensurability를 언급한 대목에서 과학철학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전에 과학철학자 장하석 교수의 책 <물은 H2O인가?>에서 접했던 주제가 언어학에서는 어떻게 적용될지 궁금했는데, Haspelmath와 Pesetsky의 논쟁에서 그 한 단면을 엿본 것 같다.
<물은 H2O인가?> 리뷰 글에서 말했듯이, <물은 H2O인가?> 1장의 내용은 '플로지스톤주의' 화학에서 라부아지에 화학으로 화학의 패러다임이 바뀌었던 '화학 혁명' 당시의 기준으로 사실 '플로지스톤주의'는 생각만큼 틀려먹은 화학 이론이 아니었고, 라부아지에 화학은 생각만큼 괜찮은 화학 이론이 아니었다는 주장이다. 즉 당시의 화학자들은 플로지스톤과 라부아지에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할 만한 충분한 근거가 갖춰지지 않은 상황에서 이론적 전향을 결심했다는 것이다.
그러한 맥락에서 <물은 H2O인가?> 1.3.3에서는 화학의 플로지스톤주의와 산소주의 사이에 어떠한 종류의 incommensurability가 있었는지를 논한다. incommensurability가 있었다면 공통의 합리적인 기준으로 두 이론을 비교할 수 없으므로, 당시 사람들에게 플로지스톤주의와 산소주의 중 어느 것을 고를지 선택할 만한 근거가 충분하지 않았다는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참고로 하스펠마트의 주장은 구문문법과 주류 변형 생성문법 사이에 incommensurability가 없으며 따라서 공통의 notation을 구축한다면 둘 사이에 존재하는 듯 보이는 차이점은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라는 이야기다.)
장하석 교수가 평가하기로 플로지스톤주의 화학 이론과 라부아지에의 산소주의 화학 이론 사이에 '의미적' incommensurability는 미미했다고 한다. 그러한 맥락에서 "작업적(operational) 수준과 현상적 수준에서 보면, 양쪽 진영이 실험과 관찰을 서술하면서 서로 명확하게 소통할 필요가 있을 때 공통으로 의지할 수 있는 충분히 이론 중립적인 용어들이 거의 모든 경우에 존재했다."(번역서 158~159쪽)라는 언급이 등장하는데, 이것은 아마도 구문문법과 주류변형생성문법이 처한 상황과 유사한 게 아닐까 싶다.
그러니까 (적어도 하스펠마트가 본문에서 말하듯 타고남innateness에 대한 강한 가정만 제외한다면) 둘 사이의 의미적 incommensurability는 거의 없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참고로 장하석 교수는 플로지스톤주의와 산소주의 사이의 incommensurability가 의미론적인 것이 아니라 주로 방법론적인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한편 <물은 H2O인가?>의 1.2.1.2(번역서 75쪽)에는 이러한 표가 등장한다. (이 표는 방법론적 incommensurability와 연관 있다.)
그리고 77쪽에는 이런 내용이 등장한다.
"산소주의자들은 [금속이 플로지스톤을 갖고 있기 때문에 광택, 가단성, 연성, 전기 전도성을 지닌다는] 대답을 배척했다기보다 ['금속들은 왜 일련의 공통 속성을 지니고 있는가?'라는] 질문 자체를 배척했던 것으로 보인다."에 주목해 보자. 이렇게 화학이 답해야 할 문제의 영역을 두 이론이 서로 달리 구획한다는 사실은 두 이론이 서로 incommensurable함을 나타낸다.
이것은 내가 대학에서 배웠던 구문문법 진영의 서사와 상당히 유사하다.
구문문법 진영에서는 대략 '주류 변형 생성문법에서는 idiom과 구문의 idiosyncrasy 문제를 충분히 주목하지 않고 있다~또는 아예 무시하고 있다'고 주장하여 둘이 서로 전혀 다른 이론임을 강조하고자 하는 듯하다. (구문문법이 더 나은 이론임을 주장하려면 둘이 서로 다른 이론임이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일 테다.)
구문문법 진영의 주장을 <물은 H2O인가?>가 제시하는 과학철학의 견본을 참조해서 다시 쓰자면 대략 아래와 비슷해질 것이다.
'idiom과 구문의 idiosyncrasy 문제는 우리 진영에서만 중요하게 여기고 잘 풀어내는 문제이고, 생성문법 진영에서는 그 문제를 잘 답변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완전히 무시한다.', '따라서 구문문법과 생성문법 사이에는 incommensurability가 있다. (그렇다면 구문문법이 생성문법보다 객관적으로 더 나은 이론이라고 주장할 수 없어지므로, 사실 구문문법 언어학자들이 직접 그렇게 주장하지는 아마 않을 것이다.)'
그러나 Haspelmath의 글에 Pesetsky가 댓글로 남긴 말들을 보면, 변형생성문법에서도 특이한 구문에 대한 연구가 활발한 모양이므로, 상황이 마냥 구문문법 측에서 주장하는 대로인 것은 아닌 것 같다. 즉 변형생성문법 진영에서 특이한 구문의 문제를 적어도 무시하는 것은 아니며, 언어학이 답해야 할 문제로서 충분히 존중하고 진지하게 임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주류변형생성문법에서 특이 구문을 연구할 때 목표하는 방향은 lumping(즉 특이한 구문을 최대한 안 특이한 구문과 같은 원리로 설명하고자 하는 것)에 가깝겠지만, Haspelmath는 Goldberg(1995)를 예로 들어 구문문법이라고 해서 lumping이 아주 없는 게 아니란 얘기를 하는 듯하다.
결론적으로 Haspelmath가 주장하듯, 구문문법과 변형생성문법 사이에는 의미적인 incommensurability이든 방법론적인 incommensurability이든 통약 불가능성(공약 불가능성)이 그다지 유의미하게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어 보인다.
(본문에서 다루지는 않았으나 두 이론은 실험 관찰 방법론에 있어서도 별달리 유의미한 차이가 없지 않은가 싶다. 직관에 대한 내성법이든 실험이든 코퍼스든 모든 방법론이 양쪽 프레임워크와 다 양립가능하다.)
+ 여담으로, 라부아지에주의 화학이론 측에서 금속의 공통 속성 같은 주제를 화학의 소관사가 아니라고 주장했던 것은 촘스키언 언어학에서 기능주의적 설명을 바라보는 것과 좀 비슷해 보인다.
구문문법도 주로 기능주의가 아니라 형식주의에 속한다면 (적어도 Fillmore식 구문문법만큼은 그런 걸로 보이는데), 하스펠마트가 말한 '우리 언어학자들은 생각보다 서로 다르지 않아'와는 또 다른 차원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
+ 본문의 많은 내용이 그렇지만 특히 Haspelmath와 Pesetsky의 논쟁이 제대로 요약된 것인지 확신이 없다. (이를테면 하스펠마트가 마지막 댓글에서 movement to COMP 이야기를 한 게 의문 도치를 가리킨 게 맞는지)
혹시 독자께서 오류를 발견하신다면 꼭 말씀해 주시기를 부탁드린다.
https://brunch.co.kr/@saokim/57
https://dlc.hypotheses.org/2470
https://brunch.co.kr/@saokim/21
+ 본문과 별 상관 없는 상상
- 음소의 개수, 형태소당 음절의 개수, 음절구조의 복잡성이 서로 트레이드오프 관계인 것
- 예측불가능한 어휘의 개수와 문법규칙의 개수가 서로 트레이드오프 관계인 것
이상과 같은 트레이드오프의 구성요소들을 정보이론적으로 계량할 수 있는 거라면
- 언어학 이론에서 통사론이 가벼워지면 음운, 형태, 화용, 어휘부가 비대해지는 것
이렇게 과학이론이나 언어학이론의 복잡성과 트레이드오프 관계도 정보이론적으로 계량할 수 있는 걸까?
-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어휘'를 딱 한 개만 남기고 무수히 많은 파생규칙으로 다른 모든 개념에 대응하는 어형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a' 유일어휘 -> /a/ 삭제 규칙 -> /o/부착 규칙 으로 'o'라는 ‘어휘’를 '설명'할 수도 있다. (당연히 이런 건 말도 안 되는 이론이지만, 제대로 계량을 하자면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는 것이다.)
- 변형생성문법에서 온갖 이동을 상정하다가 결국 이동의 개수가 너무 많아지니까 '무브알파'를 시전해 버리고 제약 위주의 이론으로 갔다고 들었던 것 같다. 제약을 통한 생성이론은 정보량이 어떻게 되는 걸까? 위와 같은 방식의 트레이드오프가 제약 이론에도 있나?
어느 부분에서든 혹 오류를 발견하시는 독자께서는 부디 가르침을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