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make me wanna be a better man."
가을은 생각보다 짧다. 성질 급한 겨울 탓이다. 이맘때면 노오랗고 발그스름한 단풍이 세상을 물들여야 하는데, 절반쯤 물들다 떨궈진 낙엽이 바닥에 뒹군다.
'아이고... 얘네는 사랑도 못 해보고 이렇게 시들고 마는구나.'
하릴없이 발에 차인 낙엽에 서글퍼지려던 찰나였다.
수줍은 사랑처럼 발긋한 단풍은 산이 아닌 다른 곳에서 물들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서울 종로구 운현궁이다. 2024년 10월 23일, 종로구청과 노인종합복지관에서 개최한 '종로 굿라이프 챌린지'가 열렸다. 그러니까, '나는 솔로'의 어르신 버전인 셈이다. 지원 자격은 엄격했다. 나이는 65세 이상, 당연한 말이지만 '짝'이 있으면 안 된다.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늙었다고 해서 열정이 식었겠는가. '첫사랑'의 아픔 대신 '끝사랑'의 진한 여운을 느끼고 싶은 외로운 사랑꾼들이 참여한 모양이다. 한껏 멋을 부린 어르신들이 설레는 마음으로 운현궁에 발을 들였다.
"아직 심장이 뜨겁다. 마음에 드는 이성에게 적극적으로 작업을 거시라"는 사회자의 말에 환호성도 터져 나왔다고 한다. '나는 솔로' 방송프로그램에서처럼 참가자들은 본명 대신 닉네임을 사용했다. 축구선수 '황인범', 트로트 가수 '배호', '촌놈' 등의 닉네임은 남성들의 것이었다. 여성들은 가을을 상징하는 '코스모스'나 '사과' 같은 정감 있는 닉네임을 사용했다고 한다.
오고 가는 정담 속에 테이블 곳곳에서는 소녀 같은 수줍음이 번졌고, 인생의 질곡을 헤쳐오며 힘들게 살아온 참가자를 향해서는 따뜻한 위로와 공감도 흘러내렸다. 1:1 대화시간엔 수준 높은 '플러팅' (이성에게 호감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농담이나 행동)도 이뤄졌다고 한다. 역시 경력자는 다르다.
모두 40명이 참여했는데 이중 6 커플이 탄생했다. 2시간 남짓의 시간 동안 12명이 사랑에 빠진 것이다. 80대 여성은 "설거지하다가도 웃고, 청소하다가도 웃고, 하루에도 몇 번씩 웃음이 새어 나왔다"며 언론과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역시 사랑은 늙지 않는다. 사람이 변할 뿐이다.
1998년에 나온 영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가 떠올랐다. 극 중 멜빈 유달 (잭 니콜슨 역)은 캐럴 코넬리(헬렌 헌트)에게 이렇게 설레는 고백을 한다.
"You make me wanna be a better man."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되게 만드는 것. 사랑은 그런 것이다. 깊어가는 가을, 사랑을 시작하기에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황혼에 찾은 어르신들의 로(老)맨스가 탐스럽게 익어가길 조용히 응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