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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서란 Oct 10. 2022

그해 겨울, 산중 암자에 여자 넷이 살았다

성별, 나이 차를 떠나 다양한 가족을 꿈꾸다

눈이 많이 오면 떠오르는 풍경이 있다. 음악이 흐르는 거실 화목난로 앞에 오손도손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네 명의 여인.


10여 년 전, 석 달간 암자에서 살았던 적이 있다. 그때 난 대학원생이었는데, 집안 문제로 스트레스가 많아 겨울방학 동안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절에 들어가 쉬고 싶었다. 불교 신자도 아니고 아는 스님도 없어 일단 2박 3일 템플스테이가 가능한 절을 찾아 참가 신청하고 무작정 떠났다. 스님한테 상황을 말씀드리고 당분간 눌러앉을 요량으로 큰 배낭에 한 달 치 짐을 싸서 절로 들어갔다. 눈이 아주 많이 오던 날이었다.


2박 3일간의 템플스테이가 끝난 후 지도법사 스님께 절에 더 머물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스님은 큰 절보다는 암자에 머무는 게 좋을 것 같다며 인근에 비구니 스님이 혼자 지내시는 작은 절을 소개해주셨다.


암자에 가니 어린아이처럼 천진한 얼굴의 비구니 무공스님과 선유보살님이 계셨다. 당시 선유보살님은 이곳에 오신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원래 절에 머물며 요리를 담당하셨던 공양주 보살님이 개인 사정으로 자리를 비우게 되자, 그 분을 대신해 잠깐 동안 암자에 머물고 계셨다.


스님과의 짧은 면접이 끝나고 이곳에 머물러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바로 법당 뒤편에 마련된 요사채에 짐을 풀었다. 스님이 거처하는 공간인 이곳 요사채는 여러 개의 방과 거실, 주방이 있는 현대식의 황토집이었다. 저녁이 되니 내가 참가했던 템플스테이의 직원 다인이가 왔다. 큰 절에서의 생활이 불편해 며칠 전부터 선유보살님이 계신 이곳에서 머물며 큰 절로 출퇴근을 한다고 했다. 무공스님과 선유보살님, 그리고 다인이까지 우리 넷은 요사채에서 모두 같이 살았다.


다인이는 20대 중반의 어린 나이에 갑상선암 수술을 받았다. 수술 후 그녀는 회사-집만 반복했던 자신의 인생이 너무 안쓰럽게 느껴졌다고 한다. 그래서 세상과 단절된 곳에서 몸과 마음을 치유하고자 100일 기도를 핑계 삼아 어느 절에 들어가 쉬던 중 그곳에서 선유보살님을 만났고, 이후 이곳 암자로 옮기신 보살님이 근처 큰 절에 일자리를 소개해 이곳까지 오게 됐다.


그렇게 무공스님 혼자 계시던 절에 2주 간격으로 선유보살님과 다인, 나, 이렇게 셋이 차례로 합류하게 되면서 우리의 짧지만 유쾌한 동거가 시작됐다. 그때 우리는 다들 힘들었던 시기다. 스님은 당뇨로 건강이 안 좋아지기 시작했고 암자에서의 생활도 편치 않은 상태였다. 보살님과 나, 다인이는 각자 가정 해체 위기를 겪던 때였다. 모두가 힘들었던 시기에 만났기에 어쩌면 우울함이 배가 될 수도 있었지만, 암자에서의 생활은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전개됐다.


암자에 들어간 다음 날부터 불편한 환경을 잘 참지 못하는 나의 레이더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만히 요사채를 둘러보았다. 스님이 추운 방에서 불편하게 생활하시는 걸 보고, 바로 방 바꾸기에 들어갔다. 그동안 스님은 혼자 짐 옮기는 일이 엄두가 나지 않아 불편해도 그냥 생활하셨다고 한다. 모두가 힘을 합쳐 큰 가구를 옮기고 짐을 정리했다. 집 구석구석 고쳐야 할 곳들을 찾아 수리한 후 대청소를 이어갔다. 저질 체력의 나는 이틀간의 정리가 끝나고 이틀간 누워 있어야 했다. 하지만 그 뒤로도 계속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 계속해서 몸을 움직였다.


아무도 시키는 사람은 없었지만 나는 매일 아침이면 일어나 큰길에서 암자로 올라가는 100m 길이의 경사로를 쓸고 또 쓸었다. 그해 겨울, 눈은 정말 하염없이 내렸다. 하루라도 치우지 않으면 눈이 무릎까지 쌓였다. 빗자루질을 하고 돌아서기 무섭게 눈은 쌓이고 또 쌓였다. 토치로 얼음을 녹여가며 두 시간 정도 눈을 쓸고 나면 정말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러다 지치면 거실로 들어와 대자로 누워 쉬다가 또다시 나가 눈을 치웠다. 이런 날 보며 스님과 보살님은 박장대소하시곤 했다. 그리고 그 길에 ‘서란로’라는 이름을 붙여주셨다.


우리는 저녁이면 재미있는 모습의 화목난로 앞에 모여 함께 시간을 보냈다. (사진 왼쪽) 다정하고 애교 많은 다인이는 한 번 만나면 누구나 다 좋아했다. (사진 오른쪽)


유쾌하고 아이처럼 순수한 스님과 완벽해 보이지만 곧잘 빈틈을 보이는 보살님, 엉뚱하게 바른말을 잘해서 스님을 당황시키는 나, 다정하고 애교 많은 막내 다인이까지 우리가 사는 모습은 마치 시트콤 같았다. 50대 초반의 스님과 보살님, 30대 초반의 나, 20대 중반의 다인, 이렇게 우리 넷은 나이로도 성격으로도 절에서는 보기 힘든 조합이었다.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우리였지만 정말 재미있게 살았다.


우리는 아침마다 식탁에 둘러앉아 차와 함께 떡과 과일을 먹으며 수다로 하루를 시작했다. 온 가족이 다인이의 출근을 배웅한 후, 남은 식구들은 각자의 시간을 보냈다. 나는 주로 청소를 하고, 눈을 치우고, 장작을 팼다. 일주일에 한두 번은 다 같이 차를 타고 멀리 떨어진 마트에 가서 장을 보고 산책을 했다.


다인이가 퇴근하고 돌아오면 우리는 다시 완전체가 되어 함께 저녁을 먹으며 하루 동안 있었던 일들을 나눴다. 화목난로 앞에서 장작 타는 소리를 들으며 불멍도 하고, 차도 마시고, 음악도 들었다. 한동안은 모두가 요거트 아이스크림에 푹 빠지기도 했다. 장을 보러 갈 때마다 요거트 아이스크림을 몇 통씩 사와 각자 예쁜 그릇에 아이스크림을 담고 위에 자른 곶감을 고명으로 얹어 먹으며 행복해했다.


다인이와는 산 정상에 자주 올랐다. 등산 장비를 완벽하게 갖추고 산행하는 등산객들 옆에서 우리는 절복을 입고 털모자를 쓰고 털고무신을 신은 채 산에 올랐다. 까르르 잘 웃고 작고 예쁜 다인이를 사람들은 동자승으로 착각하기도 했다. 그곳에서 나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어린아이처럼 살았다. 모든 것이 자유로웠다. 속세에서 나를 힘들게 했던 어떤 일도 생각나지 않았다.


암자 생활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만두 공양’이다. 우리는 만두를 질리도록 만들고 질리도록 먹었다. 처음엔 우리끼리 먹으려고 만들었는데 일이 점점 커졌다. 요리에 진심인 스님은 음식을 만들어 베푸는 걸 좋아하셨는데, 손이 워낙 커서 한 번에 만드는 양도 엄청났다. 스님은 만두를 한 번에 몇백 개씩 만들어 이웃 사찰에 나누기 시작하셨다. 혼자서는 다 하실 수 없으니 우리가 함께 도왔다. 무공스님 표 만두는 인기가 많았다. 만두 빚기는 손이 많이 가는 일이라 절에서도 특별한 날이 아니면 잘 하지 않고, 더군다나 채식 만두는 파는 곳도 많지 않으니 더욱 그랬다.


스님은 우리가 만두 좀 그만 만들자고 불평하면 눈치를 보시면서도 너무나 해맑게 “아니, 사람들이 우리 만두 맛있다고 자꾸 그러니까... 먹고 싶다는데 어떡해... 우리만 맛있는 거 먹으며 즐겁게 살 수 없잖아...” 말씀하셨다. 아, 정말이지 미워할 수 없는 분이다. 스님은 나누고 베푸는 것에 진심이었다. 만두 공장은 그 후로도 한참 동안 성업했고, ‘내가 만두 지옥에 제 발로 찾아왔구나’ 체념할 때쯤에야 비로소 문을 닫았다.


지나고 생각해보니 사람 좋아하고 정 많은 스님은 혼자 사시다가 우리와 함께 살면서 많이 좋으셨던 것 같다. 산중 암자에 여자 넷이 재미나게 산다는 소식이 골짜기 다른 절에도 퍼지면서 조용했던 암자에 손님 방문도 많아졌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만두 공양을 핑계로 우리 넷이 이렇게 즐겁게 살고 있는 걸 자랑하고 싶으셨던 게 아닐까.


말로는 만두 지옥에 빠졌다 말했지만 나도 그때의 따뜻함이 좋았다. 가끔 그때 먹은 만두가 그립다. 스님이 만든 만두소도 정말 맛있지만, 보살님의 만두 굽는 실력은 우주 최고였다. 거기다 곁들인 특제소스 또한 완벽했다. 정말 진지하게 ‘이걸 내다 팔아볼까’ 하는 생각까지 했을 정도였으니까. 무엇보다 그때 우리가 먹었던 만두는 그곳에서의 즐거웠던 기억과 따뜻했던 마음까지 함께 담겨 있어 더 특별했다.


모든 존재의 평안을 기원하는 눈사람


지금은 모두 그곳을 떠났지만, 산속 작은 암자에서 시작된 인연은 10년 넘게 계속 이어지고 있다. 우리는 서로의 안부를 묻고 왕래하며 그때의 추억을 이야기하고 그리워한다. 여전히 베푸는 걸 좋아하시는 무공스님은 소외계층을 위한 자비를 행하며 사시고, 선유보살님은 오랜 참선 수행으로 진짜 보살이 되셨다. 다인이는 좋은 사람을 만나 세 아이의 엄마가 되어 살고 있고, 나 역시 좋은 친구를 만나 잘살고 있다. 판타지 같았던 석 달간의 암자 생활은 살다가 지칠 때마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된다.


나이도, 성격도 모두 다른 우리가 만나 즐겁게 살았던 경험은 ‘이런 형태의 가족을 구성해 살아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상상을 하게 했다.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고 의지하면서 따뜻하게. 성별과 나이를 떠나 서로 깊은 신뢰를 가지고 의지하며 함께 살면 가족 아닐까? 가족이 꼭 함께 영원해야 한다는 건 어쩌면 고정관념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그땐 가족이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하지만 여전히 서로를 염려하고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이렇게 조립과 분해가 쉬운 가족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처음 생활동반자법이 논의됐을 때 참 반가웠었다.


어리와 나는 입양이라는 방법을 통해 법적 가족이 되었지만, 우리의 모습은 사람들이 말하는 ‘전형적인’ 가족은 아니다. 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가족 형태가 있다. 그럼에도 법률상 가족은 혼인·혈연·입양으로 이루어진 집단으로만 한정할 뿐, 다양한 가족을 전혀 담고 있지 못하다. 그런데 정말 묻고 싶다. 성별과 나이차를 떠나 서로 간 깊은 신뢰를 갖고 의지하며 함께 사는 사람들을 과연 가족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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