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집을 고쳐 드립니다’
얼마 전 혼자 화장실 변기의 시멘트 보양 작업을 했다. 2년 전, 집에 이사 올 때부터 변기 아래의 시멘트가 일부 깨져 있었는데 그 때문인지 얼마 전부터 변기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변기를 설치할 때 바닥과 변기를 잡아주는 부품을 정심이라 하는데, 이것의 오른쪽 고정 나사도 부러진 상태였다. 이왕 하는 김에 변기를 들어내 나사도 다시 끼웠다. 그런 후 분리한 물통과 변기를 다시 결합한 후 수평자로 변기의 수평을 맞추고 시멘트를 발라 보양 작업을 마무리했다. 변기 설치는 처음 해봤는데 생각보다 어렵지 않아 다행히 문제없이 성공했다.
일을 하다 보면 가끔 ‘힘’의 문제에 부딪힌다. 작은 키 때문에 생기는 문제는 의자나 사다리로 해결이 가능한데 무거운 건 정말 어떻게 할 수가 없다. 기술적으로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는 일을 물리적인 힘이 없어서 못 할 때는 화가 나기도 한다. 무슨 일이든 체력은 필수다. 이번 변기 수리도 혼자 하고 싶었는데 무거운 도기를 혼자 들지 못해 바쁜 어리를 호출했다. 어리는 나보다 힘이 세다. 그래서 둘이 힘을 합하면 어지간한 문제는 다 해결이 가능하다. 전문적인 기술이나 지식을 요구하는 작업을 제외하고는 간단한 수리나 환풍기 교체 정도의 집안일은 직접 한다.
가끔 출장도 간다. 출장 의뢰가 들어오면 어리와 나는 장비를 챙기고 2인조 출장 수리단이 되어 일손이 필요한 곳으로 향한다. 가장 잦은 출장지는 부모님 댁이다. 두 집 다 단독주택에 엄마 혼자 사시기 때문에 손볼 곳이 자꾸 생긴다. 우리는 살림살이도 정리하고, 가구도 옮기고, 전등도 교체하고, 페인트칠도 하고, 집 구석구석 살펴 보수하고 온다. 재미있는 건 어리네나 우리 집이나 집 안에 필요한 일이 생기면 막내딸이 해결한다는 거다. 휴대폰이 망가져도, 물건이 고장 나도, 집에 문제가 생겨도 양가 엄마들은 아들이 아닌 딸에게 전화하신다. 각자 본가에 방문하는 건 같은데 어째서인지 우리에게 보이는 집안의 할 일들이 우리네 오빠들 눈에는 보이지 않나 보다. 엄마가 생활에 불편을 겪는 요소들이 왜 딸의 눈에만 띄는 걸까. 늘 많이 관찰하고 예민한 사람이 더 피곤하게 사는 법이다.
나의 절친 ‘백’이 새로운 지역에 발령받아 이사했을 때도 우리는 출장을 떠났다. 낯선 곳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친구를 응원하고 집도 새로 단장해 줄 겸 우리는 왕복 440km를 달렸다. 친구 집은 오래된 아파트라 손볼 곳이 많았다. 우선 낡은 형광등을 모두 LED 등으로 교체했다. 방문과 현관문 손잡이는 물론이고, 화장실의 낡은 선반과 녹이 슨 수건걸이, 수도꼭지도 모두 새것으로 바꿔 달았다. 주방 싱크대엔 직수형 언더싱크 정수기를 설치했다. 옥색 페인트칠에다 어린이 맞춤형 시트지가 덕지덕지 붙여진 현관문도 손봤다. 불필요한 보조키를 떼어내고 구멍을 메꾼 후 깨끗하게 시트지 작업을 했다. 마지막으로 동선에 맞게 가구들을 다시 배치하고, 방마다 커튼도 설치했다. 2박 3일간 일만 하는 우리를 넋 놓고 바라보던 백은 달라진 집의 모습에 매우 만족해했다. 기뻐하는 고객님 반응에 우리도 덩달아 흐뭇했다.
친구네 집으로 떠난 출장 여행을 SNS에 올렸더니 동네 친구로부터 출장 의뢰가 들어왔다. 친구가 운영하는 상점 유리문에 설치한 도어록이 문틀 구멍과 어긋나 문을 잠그기가 어렵다고 했다. 그렇게 방치한 지가 벌써 수개월째란다. 어리가 퇴근한 후 함께 친구네 상점으로 출동했다. 유리문의 도어록을 분해해 살펴보니 유리문과 도어록을 고정해 주는 내부 실리콘이 헐거워진 탓에 도어록의 위치가 달라져 생긴 문제였다. 도어록을 손보는 김에 조금 내려앉은 유리문의 수평도 바르게 잡아주고 작업을 완료했다. 대가를 바라고 한 건 아니었는데 친구는 고맙다며 우리에게 감사의 선물까지 보내줬다.
난 어릴 적부터 뭐든 직접 하는 걸 좋아했다. 가전제품이 고장 나면 뜯어봐야 직성이 풀렸고, 물건이나 집에 문제가 생기면 직접 해결하고 싶어 했다. 초등학생 때는 고칠 물건도 없으면서 동네 전파사 앞을 기웃거렸고, 딱히 살 것도 없으면서 철물점에 갔다. 그땐 문방구 쇼핑만큼이나 그곳들을 둘러보는 것이 너무 재미있었다. 내 손으로 직접 물건을 고치고 해결하면 뿌듯함도 크지만 원리를 알아가는 재미가 있다. 전자제품이 고장 나 서비스센터에서 수리받아도 고장의 원인이 무엇이고 어떤 방법으로 고치는지 상세히 물어보고, 수리 과정을 직접 확인하는 편이다. 전문가에게 맡긴다 하더라도 고장의 원인과 수리의 과정을 알아두면 나중에 같은 문제가 발생했을 때 대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년 가까이 혼자 전월세 집에 살면서 최대한 돈을 들이지 않고 내 마음에 들게 조금씩 손보고 집을 가꾸며 살다 보니 경험이 쌓이면서 생활의 지혜도 차곡차곡 쌓였다.
어리는 최소한의 물건만 소유하는 ‘미니멀리스트’ 그 자체다. 고등학생 때 기숙사 생활을 시작해 단출한 짐만으로 생활했고, 언니와 살 때나 혼자 살 때도 거의 짐 없이 생활했다고 한다. 소유한 게 없다 보니 물건 고칠 일도 없고, 물건에 대한 애착도 없다. 집 꾸미기에도 관심이 없어서 주어진 그대로 살았단다. 그러다 이 지역에 오게 됐는데, 이직한 직장에서 공구 다룰 일이 많아지자 어리는 자기도 모르고 있던 재능을 발견했다. 목공에 흥미를 느낀 어리는 뚝딱뚝딱 책상도 만들고, 책장도 만들고, 밥상도 만들며 썰렁했던 집에 살림살이를 채워 넣기 시작했다. 나와 함께 살면서는 힘이 약한 나를 대신해 이런저런 일을 하다 보니 지금은 나보다도 손재주가 좋다. 덕분에 나는 옆에서 “잘한다, 잘한다” 칭찬하며 말로만 일하는 작업반장으로 승진했다. 똘똘한 어리는 내 응원에 힘입어 뭐든지 척척 해낸다.
물론 우리가 전문가는 아니다. 처음 도전하는 분야는 수리하기 전 먼저 유튜브에서 검색하며 준비한다. 시골에서는 집에 문제가 생겼을 때 도시에서처럼 기술자가 바로 와서 고쳐줄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웬만한 건 직접 할 줄 아는 게 좋다. 처음 시골 마을에 살면서 일 년간 시골살이에 필요할 것 같은 여러 종합적인 기술 교육을 받은 것도 그 때문이다. 언젠가 우리가 숲속에 집을 짓고 살게 될 때가 오면 이런 경험이 다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예전에 첫 번째 시골 마을에 이사하고 며칠 뒤, 도울 일 없냐며 동네 주민이 집에 찾아오신 적이 있다. 딱히 도움이 필요하지 않았지만, 자꾸 일거리를 찾으시기에 거절하기도 죄송해 마침 빨랫줄을 만들려던 참이라고 했다. 그분은 “여자들은 일머리가 없어서 잘 못하니 내가 해주겠다”라며 일을 시작하셨다. 군말 없이 가만히 물러나 작업을 지켜봤다. 큰 나무와 집 기둥에 줄을 묶기만 하면 되는 간단한 일이었는데, 그분은 한참을 걸려 완성한 후 매우 뿌듯해했다. 내가 보기엔 마무리도 엉망이고 엉성했는데 말이다. 그러고 나서 한동안 생색내셨다. 그분이 보람을 느끼셨으니 그걸로 됐다. 종종 그런 사람들이 있다. 으레 ‘여자는 이런 거 못해’ 단정 짓는다. 어릴 땐 “그건 성별 차이가 아니라 성향 차이”라고 반박하거나 “나도 할 수 있다”라며 거절했지만, 언젠가부터 본인이 너무 해주고 싶어 하면 그냥 한발 물러선다. 그렇게 하는 것이 저분의 기쁨이려니 하고. 덕분에 나도 귀찮은 일을 안 해도 되니 고맙게 생각한다.
해보지 않은 것에 처음 도전할 땐 누구나 지레 겁부터 먹는다. 그런데 막상 해보면 별거 아닐 때가 많다. 안 해본 것일 뿐 못 하는 것이 아니다. 공구를 다루고 물건을 수리할 때도 마찬가지다. 사람마다 재능이 다르고 관심 분야가 다르기 때문에 모두가 새로운 일에 도전할 필요는 없지만, 해보고 싶다면 겁먹지 말고 일단 가벼운 마음으로 시도해보기를 추천한다. 수리 방법은 인터넷만 검색하면 대부분 찾을 수 있다. 하다가 안 되면 전문가를 부르면 된다. 이러한 성공과 실패의 경험치가 모두 쌓이면 나중에 엄청난 자산이 될 것이라 믿는다.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여성 2인조 출장 수리단’은 오늘도 대기 중이다. 사업 확장은 무리니 가까운 지인에 한해서만. 출장비는 오직 고객님의 만족스러운 웃음이면 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