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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원 Jul 07. 2024

나에게도 서재가 생겼다

안식처, 해방구, 은신처

 

얼마 전 새로 이사를 하면서 나의 오랜 로망이자 버킷리스트 중 하나가 실현되었다. 드디어 나에게도 서재가 생긴 것이다. 서재에 대한 막연했던 동경은 2년 전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간절한 바람이 되었다. 근사하게 꾸민 서재에 앉아 글을 쓰는 나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꿈을 실현하는 과정이 순탄할 수는 없었. 새로 입주할 집의 작은 방 하나를 두고 아내와 나는 팽팽하게 맞섰다. 수납공간을 주장하는 아내의 입장에서 보자면 용도가 모호한 서재는 낭비이자 사치였다. 하지만, 돈으로 따지자면 수 천만 원이나 하는 공간을 겨우 옷가지나 잡동사니들로 채운다는 것은 나로서는 이해하 힘든 처사였다. 


더 큰 문제는 비용이었다. 서재를 꾸미는데 들어가는 예산을 보자 아내는 기겁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지루한 논쟁이 이어지는 가운데 나는 브런치에 글을 발행할 때마다 아내에게 보여 주었다. 나의 집요함에 질렸는지 아니면 작가가 될 가능성을 발견했는지 아내는  선심을 쓰듯 남편의 소원을 들어주었다. 다만, 인테리어 비용을 대폭 줄여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이사를 앞두고 두 달간 나는 더없이 행복한 나날보내고 있었다. 서재를 꾸밀 궁리에 밤잠을 설쳤고 주말마다 발품을 팔았다. 하지만, 마음에 드는 책장을 찾기는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방 크기에 맞추면 디자인이 별로였고, 마음에 든다 싶으면 터무니없이 고가였.


결국 맞춤 제작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글쓰기를 제쳐두고 책장 설계에 매달렸다. 제작은 수소문 끝낸 찾아낸 믿을만한 가구업체에 맡겼다. 그렇게 해서 세상에서 하나뿐인 책장이 서재의 한쪽 벽면을 채우게 되었다.


퇴근 후 집에 돌아오면 습관처럼 서재로 들어간다. 방안에는 세상의 온갖 소음으로부터 도망쳐 온 고요함이 묵직하깔려 있다. 심신에 묻 있는 하루의 피로와 세상살이의 번잡함을 털어내는 의식이라도 거행하듯 책상에 앉아 모니터를 켠다. 제목을 입력했다 지우기를 몇 번 반복하다가 한참 동안 멍하니 앉아 있는다.


그러다가 책장 쪽으로 고개를 돌려 여러 번의 이사에도 용케 살아남은 책들을 쓰다듬듯 훑어본다. 은은한 나무 향을 풍기는 책장에는 옛 성현들의 말씀과 먼저 살다 간 사람들의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칸칸이 담겨 있다. 그중에는 다음 날 출근 걱정을 잊게 했던 책들도 눈에 띈다.

 


서재가 생긴 후 기대했던 만큼 영감이 떠오르지 않는다. 어쩌다 떠오른 생각도 몇 줄 적다가 흐지부지 되기 일쑤다. 아직 서재에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위안을 해 보지만, 이유가 되지 못한다는 것은 나 자신이 더 잘 알고 있다.


내가 서재를 그토록 간절히 원했던 진짜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자문해 보았다. 어쩌면 글쓰기 보다 나만의 공간 자체에 대한 갈망이 더 컸을지도 모른다. 세상살이에 지친 영혼을 달래주는 안식처, 아무런 제약과 간섭이 없는 해방구, 포식자들이 찾지 못하는 은신처.. 세상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나만의 공간은 이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해결되는 곳이다. 외부의 세계와 나의 세계 사이에는 문 하나가 경계를 이루고 있다. 문은 두껍지 않지만 이쪽과 저쪽의 차이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크고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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