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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원 Oct 22. 2023

국화를 바라보며


가을이 성큼 내려앉은 옥상정원에 국화가 활짝 피었다. 봄부터 순지르기(적심)를 게을리하지 않은 덕분에 포기마다 꽃송이들이 낟알처럼 빼곡하게 달렸다. 척박한 땅에서 뜨거운 여름을 힘겹게 버텨낸 보상이 화려한 으로 피어난 것이다.

하늘과 가까운 옥상의 아침 기온이 빠르게 떨어지자 화단에는 한기가 낮게 깔리고 있다. 월동을 준비하는 화초들의 뿌리가 땅속 깊은 곳으로 파고들고, 제철을 만난 국화는 찬 공기를 머금을수록 색채는 더 선명해지고 향기는 한층 더 짙어져 간다.  



멀리 보이는 산 꼭대기의 단풍을 옮겨 놓은 듯한 분홍색과 노란색의 두 무더기는 날마다 높아지는 하늘을 배경으로 한 폭의 가을을 만들어 놓았다. 외관상 차이가 없던 두 국화는 꽃망울을 터뜨리고 나서야 비로소 서로의 색깔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국화의 대표적인 꽃말은 청결, 정조, 순결이지만, 색깔별로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흰색은 진실과 이별, 노란색은 짝사랑과 슬픔, 빨간색은 열정과 사랑, 파란색은 고귀와 평온, 보라색은 성공한 사랑, 오렌지는 정직과 고상함, 분홍색은 정조와 달콤한 꿈. 그럴듯해 보이기는 하지만, 국화의 본질과 관계없이 부여된 의미는 그렇게 굳어져 버렸다.


노란색 국화 보다 먼저 꽃망울을 터뜨린 분홍색 국화는 성격 급한 봄화초를 닮았다. 봄을 재촉하는 진달래는 꽃샘추위에도 서둘러 꽃을 피우려고 조바심을 낸다. 화사한 파스텔풍의 분홍빛도 따스한 봄기운을 연상케 한다. 바람에 일렁거리는 국화의 분홍 꽃잎을 보고 있으면 봄바람에 나풀거리는 연분홍 치맛자락이 아른거린다.


이에 반해, 노란색 국화는 서두르는 기색이 전혀 없다. 최대한 천천히 꽃망울을 터뜨리며 오래도록 가을을 붙잡아 두려고 한다. 빠르게 다가오는 겨울의 속도를 어떻게든 늦추고 싶은 것이다.

느긋한 성격의 노란색 국화는 여러 가지 얼굴을 가지고 있다. 한창 추수 중인 가을 들녘의 풍요로움이 느껴지고, 떡갈나무에 내걸린 리본이 생각난다. 서리가 내려도 식지 않은 노란 온기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위로가 되어 준다.



한편, 화단 한쪽에서 두 색상의 국화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던 미니 해바리가 마침내 노란색 꽃잎을 앙증맞게 피워냈다. 분홍색 국화보다는 노란색 국화를 더 닮고 싶었던 모양이다. 계절을 잊은 해바라기는 아침 찬 기운에 오들오들 떨다가도 점심 무렵이면 다시 정신을 차리고 부지런히 햇빛을 쫓아다닌다. 해바라기가 정말로 닮고 싶은 것은 국화의 색깔이 아니라, 서정주 시인이 살았던 동네에 서식하는 소쩍새가 봄부터 울면서 키워 낸 국화의 강인한 생명력일 것이다.


지난 몇 개월간 옥상정원에는 화초들의 이야기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자연의 섭리와 우리의 삶도 있었다. 여러 종류의 화초들이 계절에 따라 피었다가 시들었고, 화초들보다 더 많은 종류의 곤충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했다. 옥상에서 동료들과의 만남이 잦았고, 계절의 변화와 자연의 오묘함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옥상 계단을 오르내리다 보니 다리의 근육도 좋아졌다.

그리고, 마침내 내가 상상하고 있던 마지막 그림이 그려지고 있다. 국화가 눈부시게 빛나는 꽃잎을 피우기 시작하면서 가을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나의 옥상 발걸음은 전에 비해 눈에 띄게 뜸해졌다. 국화의 시즌 엔딩무대를 감상하려고 더 자주 옥상에 올라갈 줄 알았던 예상이 빗나간 것이다. 화초재배에 대한 열정과 흥미가 갑자기 식어버린 것일까. 어쩌면 보살펴야 할 화초의 종류가 줄어들었고, 정원사로서 신경 써야 할 옥상의 일이 크게 감소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옥상을 자주 올라가지 않는 이유가 단지 할 일이 줄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가을이 오기 전까지 화단을 가꾸며 고생했던 과정이 내게는 더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일지도 모른다. 황폐한 화단을 개간했고, 봄비를 맞으며 모종을 심었고, 거름을 주고 잡초와 전쟁을 벌였고, 병충해와 싸우며 농약과 영양제를 뿌렸고, 더위와 가뭄에 맞서며 아침저녁으로 물을 뿌려댔다. 이러한 일들이 만개한 화초를 감상하는 것보다 훨씬 큰 보람과 행복이었을 것이다.


가을정원은 왠지 아들을 닮았다. 대학생인 아들은 여전히 신경 써야 할 일들이 남아 있지만, 예전만큼 손이 많이 가지는 않는다. 아이를 키우는 일은 뜻대로 되지 않는 어렵고도 힘든 과정의 연속이다. 그러다가 아이가 성인이 되면 여유가 생긴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렇게 기다렸던 자유도 마냥 달콤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게 된다. 아이를 키우며 고생했던 시절을 오히려 더 그리워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지나간 행복에만 매달려 있다가는 지금의 행복을 놓쳐 버리고 다. 예전처럼 같이 놀아주지는 못하더라도,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뒤에서 묵묵히 아이를 지켜봐 주는 것이다.

이제, 다시 옥상에 자주 올라가야 할 이유를 찾은 것 같다.  자란 국화를 열심히 봐주는 것도 정원사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일 것이다. 나태주 시인의 '풀꽃'을 읊어 본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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