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과 글을 본업으로 하는 사람들에 비할 바는 못되지만, 직장인에게도 말과 글은 생업을 위한 밑천이나 다름없다. 특히, 일반 사무직의 경우 하루 일과의 대부분은 소통을 하고 서류를 다루는 행위들이다. 말과 글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성과가 달라지고 평가와 보상의 크기까지 결정된다. 하지만, 대다수의 직장인에게 말하기와 글쓰기는 여전히 과중한 노동이자 스트레스의 주범이다. 말과 글을 무기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소수에 불과한 것이 현실이다.
보고서를 잘 만들고 보고(발표)를 잘하는 사람은 어디에서나 환영을 받기 마련이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잘 꾸며진 보고서는 보기도 편하고 이해하기도 쉽다. 보고 또한 마찬가지다. 아무리 잘 만든 보고서라도 보고자의 말이 논리 정연하지 못하고 횡설수설한다면 좋은 평가를 받기 어려울 것이다. 상사의 총애를 받는 팀 내 에이스는 아무에게나 허락되는 자리가 아닌 것이다.
물론 보고서를 잘 만들거나 보고를 잘한다고 해서 반드시 역량이 출중하다거나 뛰어난 성과를 거둔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상사와 인사팀의 1차 검증을 통과하고 나면 다음 단계, 즉 진급이나 중요한 업무를 맡을 가능성이 많아진다는 것이다. 또한, 상사와의 접촉이 빈번해질수록 코칭을 받을 기회는 그만큼 더 늘어난다. 또한, 신뢰가 쌓이면 직장 내 중요한 정보를 얻을 행운까지 얻을 수 있다. 찰떡같이 만들어진 보고서는 상사의 상사를 거쳐 층층 계단을 타고 높은 곳까지 올라가면서 여러 사람들이 혜택을 누리게 된다. 말과 글을 부단히 갈고닦아야 하는 이유는 충분해 보인다.
사무직의 경우 성과를 수치화하기가 쉽지 않은 특성 때문에 일반적으로 정량평가보다는 정성평가의 비중이 높다. 문제는 업무 태도, 인성, 공헌도, 로열티, 잠재력 등과 같은 난해한 항목들에 대해 팀원들에게 순위를 매긴다는 것이 여간 난처한 일이 아니다. 평가자 입장에선 가능한 업무와 직접적 관련이 있는 역할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어 할 것이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은 글쓰기에 대한 부담이 예전에 비해 크게 줄었다는 것이다. 업무 간소화와 전산화 덕분이다. 일상 업무는 이제 개인 PC나 사내 메신저로도 충분히 가능한 시대가 되었다. 수 십장에 달하던 보고서는 줄이고 또 줄여 이제는 한 두장으로 압축되었다. 이 마저도 기존 자료들을 활용하거나 회사가 정한 표준 양식을 사용하면 손쉽게 완성할 수 있다. 최근에는 쳇 GPT까지 등장하면서 직장인들의 수고를 크게 덜어주고 있다.
보고서 평준화 시대가 열리면서 글쓰기에 대한 변별력은 거의 사라지고 말았다. 그렇다고 직장 내에서 글의 존재감이나 중요도가 완전히 사라졌다는 의미는 아니다. 평가의 비중이 과거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해졌을 뿐이다.
한편, 평가에서 글쓰기 비중이 감소하자 상대적으로 말하기 부담이 커지고 말았다. 한동안 화려한 보고서에 가려 주목받지 못했던 말이 이제는 사람들의 귀에 또렷하게 박히기 시작했다. 말로 하는 업무는 글쓰기 업무에 비해 난이도가 훨씬 더 높다. 한번 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는 데다가 보고서처럼 반복해서 수정할 수도 없다. 필요할 때 가져다 쓸 수 있는 저장소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남이 했던 말을 인용해서 써먹어 보려 하지만 감퇴하는 기억력이 도와주지 않는다.
여기에다가 결정적으로 말하기 능력은 어느 시점에 이르면 퇴보하기 시작한다. 자연스러운 생물학적 현상이다. 사람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대략 40대 초중반이 정점을 찍는다. 나이가 들면서 총기가 흐려져 쓸데없이 말이 많아지고 남의 말귀를 알아듣지 못한다. 그동안의 경험이 오히려 고집과 편견이 되어 꼰대 말투로 변하는 것이다. 한 가지 더 안 좋은 소식은 디지털 기기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면서 말을 관장하는 감각기관이 빠르게 퇴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보고서 양이 줄어든 것 또한 말의 퇴화를 가속화시키는 원인일 것이다.
회의와 보고가 많이 줄었다고는 하나 아예 없어진 것은 아니다. 중요한 사안이나 프로젝트성 업무는 여전히 큰 회의실에 둘러앉아 협의를 하고 몇 단계의 대면 보고를 거쳐 최종 결정된다. 이 과정에서 누군가는 발표를 잘해 칭찬을 받고, 또 누군가는 보고를 잘해 새로운 기회를 잡는다.
언젠가 여러 사람들 앞에서 멋지게 발표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 보자. 카랑카랑한 목소리, 프로페셔널한 말투, 논리 정연한 설명, 날카로운 질문에도 여유 있는 대처, 논쟁에 휘말리지 않은 침착함..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만 찾아오는 법이다. 발표만 잘해도 일 잘한다는 평가가 저절로 따라올 것이다.
보고를 할 때도 남들이 하지 않는 차별화된 시도를 해 볼 수 있다. 디지털 시대에는 평소 상사와 대면할 일이 그렇게 많지 않다. 상사 또한 부하 직원을 일삼아 찾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면 상사와 점점 멀어지고 관계가 불편해질 수밖에 없다. 소통 부족은 쌍방 모두에게 손해지만, 굳이 피해 규모를 따지자면 부하 직원 쪽이 더 클 것이다.
이럴 때는 '스몰보고'를 해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시시콜콜한 것까지 들고 가서는 안 되겠지만, 업무 진행 상황에 대해 틈나는 대로 상사를 찾아가 약식으로 보고하는 것이다. 단, 육하원칙과 간단명료, 이 두 가지 보고 원칙을 지키며 10분 이내로 끝내야 한다. 대면이 어렵다면 미루지 말고 즉시 메일로 보고하여 철 지난 정보가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성향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이러한 보고를 싫어할 상사는 거의 없을 것이다. 빈번한 소통은 업무 리스크와 잔소리를 막아준다. 회의와 보고가 줄었다고 다들 쾌재를 부르고 있을 때 조용히 스몰보고를 해 본다면 분명 보상이 따라올 것이다.
말을 잘해서 성공한 사례보다는 말 한마디 잘못해서 곤란한 상황에 처하거나 나락으로 떨어진 사례가 훨씬 더 많다. 말을 잘하려고 하기보다는 말실수를 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지나치게 눈치를 보며 침묵하고 있다가는 언젠가 경쟁 대열에서 한참 뒤처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중립적이고 모호한 말투는 유약해 보이기 쉽다. 후배들에게 인기가 많은 말투는 자칫 불평불만을 선동한다는 인상을 심어줄 수도 있다. 강하지 않으면서 자신감과 당당함이 묻어나는 말투, 세련되고 전략적인 언어를 사용할 필요가 있다.
말이 쉬웠던 적도 일찍이 없었지만 지금처럼 어려웠던 적도 없었을 것이다. 직장 내에는 여러 가지 언어들이 혼재되어 있다. 난독증에 힘들어하는 신입 직원의 연착륙은 직장 방언에 얼마나 빨리 적응하느냐에 달려 있다. 입사 후 한동안은 분위기 파악을 못해 말이 다소 서툴러도 주변에서 크게 문제 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직급이 올라가고 직책이 무거워지면 거기에 걸맞은 언어로 다듬어야 한다.
지시와 잔소리로 단련된 꼰대 상사는 새로운 언어에 익숙해져야 한다. 불통의 시간이 길어지면 가장 먼저 적폐 명단에 올라갈 것이다.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가고 더 많은 연봉을 받고 싶다면 외국어를 하나 새롭게 마스터한다는 각오로 젊은 직원들의 언어를 학습해야 한다. 진중하면서 사려 깊은 말투, 명료하면서 통찰이 묻어나는 언어에는 정성평가의 중요한 항목, 즉 잠재력, 로열티, 리더십까지 물씬 풍겨난다.
말을 하는 본인은 잘 모르겠지만 듣는 사람은 많은 것을 생각하고 판단한다. 회의와 보고는 말할 것도 없고 잠깐의 커피타임, 점심, 회식자리에서 조차도 당신이 하는 말은 눈치 백 단인 주변 동료들의 머릿속에 끊임없이 입력되고 있다. 웃고 떠드는 가운데도 산전수전 다 겪은 상사는 다음 프로젝트를 누구한테 맡길 것인지 귀를 쫑긋 세우고 있을 것이다. 직장에는 두 부류가 있다. 말을 잘하는 소수와 그렇지 못한 다수. 물론 성공과 출세의 기준은 각자의 판단에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