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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다익썬 Oct 24. 2022

차녀이야기 03. 성공과 실패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 : 실패가 성공을 낳았나?

"난 그 때 내 옆에 산모가 막 낳은 아들을 보면서 나도 낳을 수 있는데 생각했다. 이번엔 실패했지만 다음엔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았어."

산후조리원에서 옆 자리 산모가 이런 말을 했더라면 좀 더 좋았을 것일까? 누가 이 말을 했다면 가장 좋았을까? 아들을 낳으면 성공이고 딸을 낳으면 실패라고 생각한 사람이 누구였다면 가장 좋았을까?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 사람이 그냥 스쳐 지나가는 옆 자리 산모여도 차녀인 나는 자격지심에 부아가 치밀었을 것이다.


이 말을 나에게 한 사람은 엄마였다.

엄마.


난 분명히 엄마에게 "내가 어떻게 태어났어?"라고 물었건만 그 이야기의 끝은 내가 아닌 내 남동생이 주인공이 되고 분명 서사의 주인공은 내가 되어야 하는데 나는 실패자가 되므로 내 남동생이라는 성공자로 주인공이 교체되고 엄마의 출산 성공기로 끝을 맺는다.

보통의 영웅담은 이렇다. 주인공이 시련을 겪고 그 시련을 이겨내고 행복한 결말을 맺는 것. 친구들이 아기를 낳고 나서 만나면 우리는 친구의 영웅담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 아기를 낳은 여자들에게 출산은 일종의 영웅의 일대기 저리가라의 영웅담이다. 아기를 낳는 그 순간의 고통을 약간의 과장을 더해서 산모는 어느 영웅담 못지않게 이야기한다. 그러니 엄마에게도 출산은 일종의 영웅담이다. 그런데 엄마의 영웅담은 한 아기를 낳은 단막극이 아니라 연속극이다. 한 아기를 낳았는데 그게 시련이고 실패가 되고 다음 아기를 낳아야 해피엔딩이라는 완벽한 서사가 완성되는 연작물이었다. 

엄마의 영웅담을 완벽하게 만들어 준 서사의 전반부에 해당하는 영웅의 시련 부분에 등장하는 나라는 존재는 거의 빌런에 가깝다. 일단 태아가 너무 커서 산모는 6개월 이후 거의 잠도 제대로 못 잘 정도로 뒤척였다고 한다. 너무 큰 아기가 위를 눌러서 소화가 안되고 뱃속이 꽉 채운 아기 때문에 내장의 장들이 제 기능을 못했을 정도니 엄마는 출산일만 기다렸다고 했다. 그런데 이 놈의 출산 조차도 애를 먹였다고 한다. 두번째 출산이고 아기도 너무 커서 통증만 오면 바로 나올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고 한다. 여기서도 눈치없는 아기가 정말 느긋했다고 한다. 그 때 이미 엄마는 나의 속도와 엄마의 속도가 다르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모른다. 엄마는 어서 빨리 이 큰 아기를, 아니 아들을 낳고 싶었다고 한다. 영웅의 서사에서 그렇듯 영웅이 성장 초반에는 미혹되는 경우가 많다. 형의 시기로 집을 떠나야 하는 길동이처럼, 미혹된 존재가 나타난다. 그건 동네 돌팔이 할머니들이었다. 임산부의 배 모양으로 아들인지 딸인지 구분할 수 있다는 신이고서야 알 수 없는 그 전지전능한 능력을 가졌다고 자부하는 할머니들의 입방아에 엄마는 미혹되었다. 필시 아들이 분명하리라는 그 할머니들의 말에 미혹되어 반드시 아들이어야 하는 그 큰 아기를 빨리 낳고 싶어 했다.

하지만, 느긋하다고 좋게 표현하고 싶은 게으름뱅이 나는 엄마의 기대를 부수고 출산예정일이 지나도 그 큰 몸만 불리고 뱃속에서 나오지 않았다. 눕지도 제대로 앉지도 못하는데다가 언니 때는 겪어보지 못한 통증이 엄마를 괴롭혔다. 어쩌면 난 내 인생 최고의 최대한의 호사를 마지막까지 누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들이라는 기대 속에서 뱃속에서 인생 가장 큰 기대와 호의와 사랑을 받고 있었던 태아는 좀처럼 세상에 나올 수가 없었을 것이다. 태아가 세상에 나온 순간 자신이 날린 적 없지만 부도 수표요, 상장폐지 주식이요, 공갈빵이라는 것을 전세계에 알려야 하기 때문이다.  남구 보건소 분만 대기실에서 엄마는 당장 아기를 빼 주세요라고 외치고 싶을만큼 고통 받으며 밤새 누워 있다 끝내 아기가 안 나와서 새벽에 버스를 타고 (엄마의 표현에 따르면' 죽을 힘을 다해' 난 태어나기도 전에 죽을 뻔했다.) 다시 집으로 왔고 병원비를 아껴 집에서 버티다가 다음 날 다시 병원에 가서 낳았는데 머리가 너무 커서 회음부를 아주 많이 찢은 후에 세상에 나왔다고 한다. 하여튼 엄청난 시련을 겪은 후 엄마의 고통은 나 몰라라하고 끝까지 제 실속을 채운 태아는 고추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세상에 나왔다.

딸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엄마는 울었다고 한다. 아파서 울기도 했지만 정말 섭섭해서 울었다고 했다. 너무 많은 기대가 만들어 낸 허상을 붙잡고 엄마는 갖은 고생을 다하고 낳았으니 억울하고 섭섭할 만도 했다.  하지만, 잠시 후 엄마 옆에 갓 출산을 하고 누운 산모가 아들을 낳았다는 말을 듣자마자 엄마의 눈물이 쏘옥 들어가고 방금 전 생사의 기로에서 극단의 고통을 경험했던 분만실을 쳐다보며 다시 저기로 들어간다면 아들을 낳을 수 있을거라는 확신이 들었다고 했다. 


그 때 엄마는 저 말을 했다. 


그리고 엄마의 무시무시한 확신은 2년 후 이루어졌다. 

고추를 달고 홀연히 나타난 존재 내 남동생. 이로서 엄마의 영웅담은 완벽하게 마무리 되었다.


유전자의 성공담.

이미 자신의 생존 담보인 Y염색체를 가진 아들인데 그는 욕심이 많았다. 아니 어쩌면 이것 또한 나를 차녀로 만든 신의 농간 플랜B였는지 모른다. 내가 차녀로 태어났을 때부터 난 엄마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아빠를 너무 닮은 언니가 있으니 나의 유전자의 향방은 엄마였다. 그런데 2년후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빨간 아기가 집으로 왔다. 심지어 몇 가닥 안되는 머리카락은 노랗기까지 했다.  고추만 달렸지 그 생김새는 여느 아기와 달랐다. 몸이 빨갛다니!! 완전 까무잡잡 언니도 아니고 덜 까무잡잡 나도 아닌 빨간 아기가 집에 나타났다. 그런데 그건 그가 남자아기라는 빨간 고추를 상징하는 그 색채적 이미지와 어울려, 겉으론 표현하지 않았지만 일주일동안 고심해서 심지어 아기의 좋은 팔자를 위해 출생신고의 이름과 집에서 불리는 다른 이름까지 철저하게 두개를 준비하신 할아버지, 소고기를 사서 미역국을 끓이고 전화비 조차 아까워 하셨는데 지인의 지인에게 전화로 자랑질을 하셨던 할머니,  이때는 건망증이 다 낳으셨는지 2년 사이에 가정 경제가 좋아졌는지 국내 의료환경이 좋아졌는지, 살지 죽을지 라는 변명 따위는 할 필요가 없는지 지체없이 출생신고를 한 아버지, 그리고 이 모든 기쁨을 만들어 낸 성공담의 주인공 어머니까지 아기의 붉은 몸 따위는 신경쓰지 않았다.

 그리고 그 홀연히 나타난 자는 자라면서 자신의 붉은 몸을 지우고 본색을 드러냈다. 

아주 하얀 피부색. (태어났을 때 몸이 붉었던 이유가 피부가 너무 투명하게 희어서 핏줄이 잘 드러나 보여 붉게 보인 것이라고 한다. )

그는 욕심쟁이였다.  아니 엄밀히 말해서 그의 유전자는 아주 아주 아주 지독하리만큼 이기적이었다. 이기적인 유전자의 끝판왕이 내 남동생의 유전자였다. 그러니깐 이제는 내 남동생 유전자의 성공담이다. 그 놈의 유전자라는 놈이 정말 욕심쟁이였다.  "Y"염색체를 가진 것만으로 아버지의 유전자를 받았음을 이미 만방에 알렸음에도 하얀 피부와 옅은 갈색 머리, 갈색 눈동자를 가진 외국 아이같은 유전자는 밀가루 만큼 하얀 피부와 갈색의 머리를 가진 엄마와 똑 닮은 것이었다.

"아들은 엄마를 똑 닮았네."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차녀로서 내가 조금 기대고 있었던 엄마의 유전자. 그건 엄마의 이기적인 유전자가 아니라 조금 엄마 닮은 서투른 유전자였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엄마 유전자도 아니고 아빠 유전자도 아닌 애매한 유전자 몰빵인 차녀에게 돌아 오는 덕담이 있다.

"넌 누구 닮아서 이러니?"

그렇다. 누구도 정확하게 닮아내지 못한 나에게 숙명처럼 들어야 하는 말이다. 누굴 빼다 닮아야지 속시원하게 피할 수 있는데 이 무슨 신의 장난질인지. 누구도 정확하게 닮아내지 못한 나의 정체성이 드러난 것이다. 나의 정체성은 뱃속 태아였을 때, 숨겨져 있을 때가 좋았는지도 모른다. 내 동생이 태어나기 전 2년동안 가장 좋았는지도 모른다. 차녀로서 행복하다고 만족했어야 했는데 출생신고 하나 늦은 걸로 트집 잡고 징징댄다고 신께서  나에게 "넌 엄마를 안 닮았어. 앗, 아빠도 안 닮았네."를 친절하게도 알려주셨다.


엄마의 출산 성공기를 나는 자라면서 종종 들어야 했다. 엄마에게 출산 성공기였고 나에겐 탄생 비화 아니 탄생 실패기인가? 하여튼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했는데 울엄마는 나를 낳은 실패를 딛고 아들 즉 내동생을 낳은 성공을 이루었으니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명언과 정확하게 맞닿는다. 그런데 실패인 내가 성공인 동생을 낳은 건 아닌데 말이다. 그러나 내가 태어나야 동생이 태어날 수 있었다는 운명은 변함없으니 이 말도 언뜻 맞는 것 같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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