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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다익썬 Nov 08. 2022

차녀이야기 06. 존재와 부재 사이

'있으나마나'한 나

우리 말에 '있으나마나'라는 말이 있다.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 이란 뜻이지만 기울기는 없다에 더 기울어져 있다. 있지만 쓸모없다는 의미. 없어도 무방하다는 의미. 그게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된다는 말. 있지만 쓸모없는 사람이고 없어도 무방한 사람.  처음 이 단어를 접했을 땐 차녀인 나를 보고 한 말인가 싶었다. 난 태어났기에 존재했지만 남동생이 태어나고 나만 시골로 보내졌다. 태어났지만 가족을 위해 나는 쓸모없는 사람, 또는 없어도 되는 사람이었다. 가족 안에 나는 부재했고 나에겐 어머니라는 존재가 부재하게 되었다. 

 존재와 부재라는 실존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차녀는 존재하는 것인가 부재하는 것인가? 그 중간 어디쯤에 차녀가 있는 건가? 첫째는 처음 낳은 자식이라 여자아기였음에도 서로 타인으로  만난 두 부부 사이를 이어주는 첫 연결고리의 의미를 가진다.  혈연으로 맺어지는 가족의 가장 최소 단위를 만들어 준 존재이다. 그리고 아들은 성씨와 재산, 집안의 가풍을 이어 줄 존재로서 남아선호사상이 지배적인 사회에서 반드시 필요한 존재이다.  그들의 존재 이유와 의미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의심하거나 걱정하지 않는다. 존재 자체가 기쁨이고 축복이 된다.  

그런데 왜 차녀에겐 존재 자체에 대해 의문을 갖고 때로는 의심 받고 때로는 걱정하고 때로는 부정당하고 기쁨이나 축복 따위는 바라지 않더라도 존재 자체를 인정해 주는 것까지 바라는 건 너무 큰 바람이었던가?  뒤늦은 출생신고로 인해 이미 비뚤어진 내 심사가 만들어낸 억측의 차녀 일기였으면 좋았는데 만23개월에 시골로 보내진 일은 나는 차녀로 태어난 나의 실존적 의미까지 고민하게 되었다.  

 차녀 엄밀히 말해 아들로 태어나지 못한 두번째 자식은 가족을 이어주는  연결고리의 기능에서 현격히 부족했나? 언니는 국민학교 입학을 앞두고  글자도 익히고 학교 갈 준비도 해야 해서 남아 있어야 했고 갓 태어난 남동생은 엄마 젖을 먹어야 해서 곁에 두어야 하고, 그런데 3살이 된 차녀가 이러한 중대한 해당사항도 없는데다가 세상 모르고 뛰어다니고 한시도 눈을 뗄 수 없어서 시골로 보내진 것. 엄마의 말에 따르면 장사도 바쁘고 아기도 봐야하는데 연년생인 (엄밀히 말해서 연년생이 아니다. 난 78년생, 동생은 80년생. 하지만 엄마는 매번 연년생이라고 한다. 생일까지 따지면 정확히 만23개월 차이) 나와 동생을 양육하는 게 힘들어서 그랬다고 한다. 그런 간단한 이유로 빚어진  일에 대해 존재와 부재라는 심오한 존재론적 문제를 들고 나오는 내가 오바일 수 있다.

 해학과 풍자와 더불어 과장의 민족에게 '오바의 나 ' 하나쯤은 흐린 눈으로 봐주시면 안될까 싶다. 누군가는 기억도 나지 않는 3살 때 일로 이렇게 트집을 잡는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1000일의 돌봄이라는 다큐를 본 적이 있다. 만36개월 이전까지는 아기를 양육하는데 있어서 일관된 양육자와 양육자의 태도가 중요하다는 내용이었다. 실험을 통해서 이를 보여주었는데 실험 내용은 아이들이 즐겁게 놀고 있는 상황에서 큰 소리를 내어 놀라게 하는 것이었다. 주양육자가 근처에 앉아있는 경우 놀란 아이들은 바로 주양육자의 무릎으로 달려가서 안정을 찾았다. 하지만, 주양육자가 없이 놀고 있던 아이들은 그저 놀라서 주변을 바라 볼 뿐이었다. 그 아이들의 눈빛에는 두려움이 가득했지만 그것을 해결할 방법이 없어 그냥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어떤 상황에서 자신을 보호해주거나 문제를 해결해 줄 이가 없다고 생각하는  아이들은 그저 놀라거나 두려워할 뿐이었다. 그 아이들이 세상에서 배운 것은 무엇일까? 그 때의 부재에서 잠시 느꼈던 그 무력감은 어른이 된 그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 누구는 손쉽게 해결하는 문제 앞에서 그저 전전긍긍하며 더 큰 무력감과 무능감을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전문가들은 단 1000일만이라도 양육에 최선을 다하길 바라는 마음에 그런 프로그램을 만들었다고 했다.

 그러나 난 1000일을 채우지 못하고 만 23개월의 나는 지금껏 나의 전부였던 주양육자였던 엄마가 사라졌다. 주양육자만 사라진 것이 아니라 매일 보던 일상이 바뀌었다. 매일 눈을 뜨며 보던 도시의 일상이 아니라 시골의 일상이 시작된 것이고 어머니가 아닌 할머니의 얼굴을 보며 하루를 시작해야 했다. 할머니는 아기였을 때도 단 한번도 나를 안아주신 적이 없는 분이 손자를 키워야 하는 며느리를 위해, 돈을 벌기 위해 새벽부터 일어나는 안쓰러운 아들을 위해 탐탁치 않게 여기는, 고추 안 달린 여자 아이를 업고 깊은 산골로 들어간 것이다. 그것 역시 할머니에게 자의가 아니었고 나 역시도 자의가 아니었기에 우리의 만남은 처음부터 엇나가 있었다. 만36개월의 따뜻한 보살핌이 없었다고 단언하지는 않는다. 지독히도 내새끼만 사랑하셨던 할머니가 그 내새끼 중 가장 사랑하는 아들의 아이인 나를 미워하시지는 않았다.

 나이가 40이 넘어서도 나는 내 존재 의미를 가끔 찾고 있다. 이게 어쩌면 철없고 철딱서니 없는 아줌마의 못 볼 꼴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아직도 만 23개월에 시골이라는 낯선 환경에 떨어져서 매일 보던 엄마, 언니, 아빠를 잃어버린 상황에서 살아야 했던 아이였고 그 때의 트라마우마를 가진 사람이어서 일지도 모다.  1000일의 돌봄을 제대로 받지 못한 사람이 성장해서 겪는 결핍감을 이렇게 글로 항변하고 싶은지도 모른다.

 차녀에게 존재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면 뭘까? 존재하는데 부정 당해야 할 때? 한 가족인데 부재 당해야 할 때?  <개인주의자 선언>이라는 책에서 공부를 잘 하든 못 하든 인간은 최소한 한 가지의 재능은 가지고 있다고 했다.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 주는 재능'.   로봇이 인간의 많은 일들을 대체할 것이고 인간이 생산적인 일을 하지 못하더라도 인간은 부모, 자식, 친구, 연인, 이웃, 길 가는 누군가에게든 행복하게 해 줄 재능이 있다는 것.  내가 차녀로 태어나서 내 존재 의미를 가족내에서 발견할 수 없었지만 책 내용처럼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 주기 위해 인간은 태어났고 차녀라 그 누구도 나를 원하지는 않았지만 태어났기에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난 태어나 처음으로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 주었다. 

 나의 부재로 엄마는 행복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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