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가면 꼭 사오는 것
학창 시절 10년을 일본에서 지내면서, 머리를 항상 저녁에 감았다. 어렸을 적 보던 일본 드라마에서는 남편이 퇴근하고 집에 들어오면, 상냥한 아내가 앞치마를 두르고 현관까지 나와 "목욕? 아니면 식사?"라고 묻는 장면이 꽤 자주 나왔었고, 그럼 남편이 "음 오늘은 좀 피곤하니까 목욕부터 할까?"라든지, "오늘은 배고프니까 식사부터 할게"라고 답했었다. 나중에 결혼하면 나도 저런 순종적인 아내가 될 것임을 의심치 않았었지.
한국에서 대학교를 다닐 때, 한국 친구들이 '오늘 머리를 못 감고 와서 모자를 쓰고 왔어'라든지 '늦잠을 자서 앞머리만 감고 왔다'라든지 등의 이야기들을 들으면 처음에는 정말 당황스러웠다. 이런 에피소드는 한국 예능 프로그램 같은 것에서도 볼 수 있었는데, 이런 것을 접할 때마다 속으로 혼자서 일본인 특유의
"ええ~!!(에~!!!)"(놀랐을 때 하는 감탄사)를 외치곤 했다. 그냥 말하지 말지, 아니 모자를 쓰고 오지 말지, 굳이 써서 저 오늘 머리 안 감았어요라고 광고는 왜 하는 걸까. 필요 없는 그 솔직함에 매번 궁금하기도 했었지만 그냥 묻지는 않았었고 한국 사람들은 머리를 아침에 감는다는 사실을 그렇게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국제교류 프로그램에 선발된 10명의 남학생들과 함께 일본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6박 7일의 일정 중 3일은 1964년 도쿄 올림픽이 열렸을 때 외국 선수들이 묶었다던 선수촌 요요기 올림픽센터 숙소에서 묶고 나머지 3일 동안은 일본 친구 집에서 홈스테이를 했다. 요요기 올림픽센터의 욕실 이용 시간이 저녁 10시까지이고 아침에는 이용 불가능하다고 일본 선생님께서 안내를 해주시니 우리 학생들은 당황했다.
"그럼 머리는 언제 감아?"
사춘기 시절 열심히도 사서 읽었던 일본 소녀 잡지에는 "궁금해! 다른 친구들의 목욕 타임"과 같은 특집도 흔히 찾아볼 수 있었는데, 목욕을 몇 분 정도 하는지, 그 긴 시간 동안 욕조에서 뭘 하는지, 목욕과 식사 중 무엇부터 하는지 또 그 이유는 뭔지 등이 실려있었다.
"일본 사람들은 휴식의 개념으로 목욕을 하기 때문에 매일 욕조에 물을 받아서 20~30분 정도 욕조에서 쉬다가 나오는 사람이 많이. 한국에서는 씻는 개념이 강하기 때문에 후다닥 샤워만 하고 나오는 우리와는 좀 문화가 다르지? 선생님 지인 어떤 분은 이번에 집 인테리어하면서 어차피 안 쓰니까 욕조를 아예 없앴다고 하시더라고. 사실 선생님한테는 그 이야기가 너무 흥미롭게 다가왔어. 이렇게 문화가 다를 수가 있구나. 너희들은 어때? 어제 집에서 욕조에 따뜻한 물 받아서 목욕한 사람 있니?"
"그래서 '목욕을 하다'를 일본에서는 '목욕에 들어가다'라고 말하니까 동사 はいる(하이루:들어가다)를 써야 된다."
"너희 선배들 중에서는 국제교류로 일본에서 홈스테이를 할 때 아침에 머리를 감고 싶어서 호스트마더한테 목욕을 하고 싶다고 말한 거야. 선생님한테 배운 대로 올바른 일본어를 쓰려고 나름 생각해서 'する(스루:하다)'를 안 쓰고 'はいる(하이루:들어가다)'를 썼대. 너무 잘했지? 근데 호스트마더가 어떻게 해줬을 것 같아? 목욕을 하고 싶다고 하니까 글쎄 그 바쁜 아침에 욕조에 물을 받아주셨대. 그 학생은 어떻게 했을까? 아까워서 잠깐 들어갔다가 나왔다고 하더라고. 그럴 때는 그냥 シャワー をする(샤와-오 스루:샤워를 하다)라고 하면 될 것 같아."
"그래서 선생님은 일본에서 하던 습관이 있어서 머리를 저녁에 감아. 한국에서는 머리를 아침에 감는 사람이 많더라?"
신나게 일본 문화에 대해서 수업을 하고 있는데,
"으악, 쌤, 더러워요"
매일 자기 전에 머리 감고 씻는 사람인데, 더럽다니. 샤워도 안 하고 손 발만 씻고 이불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훨씬 깨끗하다고 생각하지만 당당하지 못하여 검색창에 '저녁에 머리 감기'를 입력해본다. 나와 비슷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안심한다.
일본에 있을 때 한국에서는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발은 닦고 자라~'라는 말이 너무 재밌다며 일본친구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발만 닦으면 되는 건가요? 그냥 샤워하면 안 되나요.
일본에 가면 꼭 사 오는 것. 그것은 입욕제이다. 욕조에 물을 받아 입욕제를 하나 풍덩 집어넣으면 금세 우리 집 목욕탕이 온천으로 바뀐다. 최애 힐링하는 방법 중 하나인데, 한국에서는 구하기도 쉽지 않고 있어도 비싸서 아쉽다. 목욕을 즐기는 일본인만큼, 일본 마트에 가면 다양한 입욕제를 쉽게 찾을 수 있다. 알록달록한 입욕제 중에서 기분에 따라 색깔을 골라 욕조에 퐁당 던지면 바로 낭만이 찾아온다.
입욕제 쓰며 목욕을 즐기는 사람인데, 더럽다니.. 억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