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 샤넬백 200만 원으로 못사"
1월 말의 도쿄 날씨는 조금 쌀쌀하긴 해도 하루종일 걸어서 다닐만했다. 귀국한 지 이틀이 지났는데, 이틀 연속 싸늘한 느낌이 온몸을 휘감아 잠에서 깬다. 딱히 악몽을 꾼 것도 아닌데, 끔찍하고도 절망스러운 느낌. 도쿄 하네다 공항에서 온몸으로 느꼈던 바로 그 느낌이다.
이번달에 소멸되는 마일리지가 있으니 제주도라도 다녀오자는 남편 말에 급 여행일정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휴가가 가능한 날을 고려해서 마일리지석으로 검색하다 보니 제주도행 비행기 자리는 이미 없었다. 둘째 아들 친구 몇 명이 베트남 풀빌라에 다녀왔다고 한 것이 생각나 검색해 보니, 여기도 만석이다. 에이, 일본도 괜찮지. 이왕이면 안 가본 소도시로! 없네. 어디든 상관없는데, 일정에 맞는 자리가 없다. 회사일에 학기말 업무에 치이느라 애들 챙기느라 여행계획을 세우는 데 속도가 나지 않았고 여러 날에 거쳐 아시아나 항공사 사이트를 들락날락거렸다.
아이들이 일찍 잠든 어느 날, 차분히 둘이서 노트북 앞에 앉아 수십 번의 클릭 끝에 우리 스케줄에 맞는 일정으로 도쿄 하네다로 가고 오는 자리가 남아있는 것을 발견했다. 밤 11시 25분이라는 늦은 도착 시간이 마음에 걸렸지만, 어쩔 수 없다. 여러 번 가본 도쿄라는 것도, 늦은 시간에 도착하는 것도, 돌아오는 날의 이른 비행기 시간도 마음에 안 들었지만.
비행기를 예약했으니 시작이 반이다. 여러 유튜버들의 추천들을 참고하고 가이드 북까지 도서관에서 빌려서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도쿄 여행하면 아무래도 신주쿠가 메인이지만 이번에는 안 가본 곳으로 가서 한적한 도쿄 골목에서 감성 가득한 사진을 찍고 싶었다. 막내가 유치원 친구들에게 도쿄에 간다고 자랑을 했나 보다. 친구 엄마들은 휴양지도 아니고 애를 데리고 도쿄를 어떻게 가냐고 놀라워했다. 우리 후기를 들어보고 괜찮은 것 같은지 판단해서 자기들도 도쿄 여행을 고려해 보겠단다. 속으로 '나 일본 전문가야~'라는 마음으로 잘 즐기다 오고 싶었다.
여행 날짜가 얼마 남지 않아서 그런지 숙소를 찾는 데도 쉽지가 않았다. 유튜버들이 추천해 준 가성비 좋은 숙소들은 다 매진. 이미 가기로 했는데, 잘 곳이 없을까 봐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전 세계에서 도쿄로 여행 가는 사람들이 정말 많다는 것을 실감했다. 수십 번 아니 정말 백번 넘는 클릭의 결과 아사쿠사 근처의 숙소를 예약할 수 있었다. 도쿄에는 업무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여러 번 갔었지만, 막상 도쿄역에는 가본 적이 없었는데, 일본 나고야에서 생활하고 있을 때, 도쿄역 앞 마루노우치 지역이 일하고 싶은 오피스거리로 매번 꼽히는 곳이었기에 왠지 동경하는 마음이 있는 거리였고, 야경도 예쁘다는 소리도 들어서 이번에 꼭 가보고 싶었다.
오랜만의 일본 나들이에 신이 난 이기적인 엄마가 짠 코스는
첫째 날: 오전 아사쿠사를 구경하며 맛있는 거 먹으면서 돌아다니기. 오후에 긴자, 도쿄역 쪽 구경하기, 상황 봐서 야네센(야나카, 네즈, 센다기, 이 세 지역을 통틀어서 부르는 표현)으로 이동해서 일본 감성 사진 찍기
긴자: 큰 장난감 가게가 있다고 하니, 예의상 거기에 들려주고, 유명한 긴자의 우동집에서 점심을 먹고, 긴자 식스를 구경하고, 양말 쇼핑도 하고, 이토야에 가서 아기자기한 문구류 쓸어 담아 오기. 중간에 맛있는 디저트 먹기
도쿄역: 라멘 스트리트, 캐릭터 스트리트에서 장난감 사주고 난 신마루노우치 빌딩에 가서 구경하기. 도쿄역 앞에서 사진 찍기 가능하면 야경 보기
둘째 날: 역시 도쿄에 간 이상 신주쿠-시부야-하라주쿠를 가야 될 거 같아서 먼저 예쁜 카페들이 있는 오모테산도역에서 내려서 구경을 하며 맛있는 것도 먹고, 시부야, 하라주쿠까지 걸어서 이동. 비교적 밤늦게까지 여는 쇼핑몰이 있는 신주쿠는 마지막 일정으로. 아들 축구화를 위해 시부야의 축구 용품 전문점에는 반드시 들릴 것!
지인찬스와 가이드북의 도움을 받아 나름 완벽하게 짰다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숙소 잡을 때부터 느꼈지만, 어딜 가나 사람이 미어터졌다. 카메쥬의 도라야끼(도라에몽 최애 간식)는 딱 봐도 1시간 이상 대기해야 될 것 같아서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그 외에 이것저것 다 먹어보고 싶었는데, 의욕과는 달리 한 두 개만 먹어도 배가 찼으며, 긴자 거리에서는 우아하게 키르훼봉 타르트를 먹고 싶었으나 대기 시간은 90분.
이기적인 엄마 취향대로 돌아다니려고 했지만, 마음대로 될 리가 없었고, 아이들의 원츠에 응대하면서 내 원츠까지 충족시킬 수가 없었다. 꿈이 컸다. 욕구불만인 나를 눈치챘는지, 마지막 밤에 자유시간을 준다며 남편이 아이들을 데리고 따로 구경하겠다고 했다. 그 덕에 드디어 2시간의 자유시간을 얻어 낼 수 있었다.
귀국하는 날 비행기 시간에 맞추어 하네다 공항으로 출발했다. 구글맵을 활용하여 호텔에서 많이 걷지 않고 버스와 지하철을 갈아타 공항에 순조롭게 잘 도착했다. 남편과 이번 여행은 어쨌든 큰일 없이 다행이라고 하면서 하네다 공항에 도착하여 아시아나 카운터 앞 기계로 여권을 스캔하는데, 내 이름이 예약자 명단에 없단다. 응? 아들이 자기도 해보겠다며 여권을 스캔하는데 똑같이 뜬다. 이상하네. 그래도 난 일본어 구사자니까, 망설임 없이 카운터로 돌진한다.
"제 이름이 명단에 없다고 뜨네요? 확인 좀 해주실래요?"
"12시 30분 비행기이십니까?"
"아니요, 1시 30분인데요."
"네? 그 시간에는 비행기가 없는데.. 아, 혹시 여권 보여주시겠어요? ........... 이미 비행기가 떴어요."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침 1시 반 비행기입니다 고객님."
"네?? 비행기가 이미 떴다구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고 모골이 송연해졌다. 남편을 급히 불러서 상황을 설명했다. 아시아나 일본인 직원이 어딘가에 전화를 걸어 확인하더니 마일리지석이라 시간 변동이 가능하면 해줄 수 있는데 다른 시간대에도 두 자리정도 밖에 안 보인다고 했다. 혹시 모르니 아시아나 고객센터에 전화를 해보라고 했고, 아니면 우리가 놓친 새벽 1시 30분 비행기의 24시간 후인 다음날 새벽 1시 30분 비행기는 자리가 있을지도 모르니 밤 11시 20분쯤에 카운터로 다시 찾아오란다. 아시아나 고객센터에 전화해도 아마 바로 연결은 안 될 수도 있으니 여러 번 해보라는 말과 함께 고객센터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다. 뭔가를 듣고 남편에게 전달은 했는데, 도대체가 무슨 말인지 이해가 잘 안 되었고 지금도 사실 내용이 기억이 잘 안 난다.
가져간 스마트폰으로 전화 수, 발신이 가능했지만, 혹시라도 전화요금 폭탄을 맞을까 봐 이제라도 로밍을 신청해야 하는지 난처했지만, 젖은 솜보다 무거운 정신을 붙잡아 공중전화로 향해 가서 10엔짜리를 몽땅 집어넣어 고객센터로 연결시켰다. 통화를 해보니 하네다 공항에서 출발하는 비행기는 없고, 외곽에 있는 나리타 공항에서 출발하는 비행기는 아직 몇 자리 남아있다고 한다. 남편이 고객센터 직원과 한참을 통화하고 있고, 난 바로 옆에서 혹시라도 전화가 끊어질까 조마조마하며 첫째가 지폐를 100엔짜리와 10엔짜리 동전으로 바꿔온 것을 부지런히 넣으며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난생처음 공중전화기를 본 막내가 갑자기 전화를 끊어버렸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참고 있던 속상함과 혼란스러움이 둘째를 향했고 버럭 화를 냈는데, 남편은 괜찮다고, 전화 끊겨도 우리 가족 죽지 않는다며 애 잡지 말라고 다독여준 덕분에 이성을 되찾았다. 아 국제 미아가 되는 것인가. 한국까지 걸어서 갈 수도 없고, 헤엄쳐갈 수도 없고, 자리가 없는데 태워달라고 떼라도 쓰고 싶은데 그럴 수도 없고. 막막하다는 것이 바로 이런 거구나. 정신이 없는 와중에 그날 입은 민트색 카디건이 영 거슬렸다. 전날 남편이 사준 것이다. 이걸 사고 있을 시간에 공항으로 갔었어야 하는 건데, 그놈의 쇼핑에 정신이 팔려서 이게 뭔 짓인지. 나 자신이 부끄러워 옷을 벗어던져버리고 싶었다.
인터넷으로 나리타 - 인천으로 네 명 자리를 예매를 하려고 하니 20만 엔이 훌쩍 넘는 가격에 살짝 망설여졌지만, 도쿄에서의 시간이 너무 짧아서 아쉽다는 생각은 이제 다 사라지고 한국에서의 일상생활이 간절해졌기에 결제해야만 했다. 2시간을 걸려 다시 전철을 타고 나리타로 향하는데 일본 특유의 모자 색깔을 바꿔 써서 체육복을 입고 있는 귀여운 초등학생들의 체육 시간의 풍경도 볼 수 있었고,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베란다에 빨래집게로 빨래와 이불을 햇빛에 말려놓은 모습들을 한참 보고 있으니 내가 그리도 원하던 일본 시골 풍경을 결국 보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첫 나리타 공항 입성을 하게 될 줄이야. 막상 나리타에 도착을 하니 또 예약이 잘못되었다고 명단에 없다는 말을 들을까 봐 조마조마하기 시작했고, 짐까지 부치고 나서야 안도가 되면서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비행기 탑승을 기다리면서 남편과 이 상황을 어이없어하면서 서로 자기가 평상시에 얼마나 준비성이 철저한지 어필을 했으나 아무 소용없었고, 그래도 새벽 1시 반 비행기인 것을 알았더라면 아예 일본에 안 왔을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좋게 생각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남편이 출근하면서, 그 돈으로 샤넬백 사줄 수 있었는데 라며 아쉽다고 한다.
"오빠, 샤넬백 200만 원으로 못사"
가방 하나도 못 살 정도의 돈인데, 그리 큰돈도 아닌 듯하다. ㅋㅋ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은 이런 바보 같은 실수를 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분명히 지금 속으로 나는 절대 안 그럴 거야라고 생각하고 계시겠지만, 저도 그랬답니다. 이런 드라마 같은 일이 벌어질 줄이야!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우리 아들이 이 여행을 평생 기억을 하게 될 것이고,
실수를 거울삼아 앞으로 이런 실수를 하는 일이 없겠지요.
이상 이백만 원짜리 글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