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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카리 Feb 25. 2024

새 학기마다 필요한 만능치트키

제 은사님을 소개합니다.

새 학기를 앞두고 항상 생각나는 우리 선생님

 3월 초. 새 학기를 맞이하여 가슴이 콩닥콩닥 거리고 있는 사람은 학생들뿐만이 아니다. 태연한 척하고 있었지만, 아마 교실에서 가장 긴장하고 낯설어했던 사람은 나였을 것이다. 학기 초에 카리스마를 발휘해야 무조건 앞으로의 학급 운영이 수월하다는 진리를 깨달은 지 오래되었음에도 사랑과 인정에 메말라있어 '좋은 선생님'을 만나서 다행이다는 첫인상을 가져주길 바라고 있기 때문에 착하고 다정해 보이는 선생님 컨셉을 10년이 넘도록 못 버리고 유지하고 있는 이 욕망쟁이 교사는 첫 단추를 잘 끼우기 위해 아이들과 첫 상견례를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매번 고민이 많다. 교실 안에는 새로운 환경에서 조용히 있고 싶어 하는 학생들도 많고, 그와 달리 외향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학생이라고 하더라도 3월 초에는 대부분 눈치싸움을 하며 정체를 숨기고 있기 마련이기에 배려심 넘치는 이 소심한 선생님은 첫 시간의 국룰인 '자기소개하기'는 시키지 않는다. 현란한 언변으로 50분을 때울 수 있는 능력은 없는 선생님이지만 다행히도 만능 치트키가 있다. 나의 자랑인 은사님에 대한 이야기보따리를 들고 추운 학교 복도를 비장하게 걸어가며 교실로 향한다.




 우리 가족이 일본 나고야시로 이사를 가게 되었을 때, 다니게 된 일본 초등학교에서 나이 그대로 3학년으로 배정이 되었고, 두 살 터울인 동생은 일본에서 초등학교 입학식을 치르게 되었다. 우리 집은 시내 중심부에 있었기 때문에 가장 가까운 초등학교에는 6개 학년에 모두 한 개 반씩만 있었다. 3학년 담당인 선생님은 고바야시 선생님이라는 여자 선생님이셨고, 개교 이래 첫 외국인 학생을 자기 반으로 맡게 된 선생님은 한국에서 온 낯선 이를 친절한 미소로 맞이해 주시며 곧바로 교탁에서 가장 잘 보이는 앞에서 두 번째 줄에 앉히셨다. 뒤이어 내 자리를 중심으로 자리 배치가 착착 이루어졌는데,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선생님은 우리 반 친구들이 2학년 때부터 맡아서 그 멤버 그대로 3학년으로 올라오신 상태였기 때문에 내 주변에는 순하고 착한 아이들을 앉게 하셨으며, 내 옆자리에는 반에서 가장 똘똘한 여자 아이를 앉혀 짝꿍으로 만들어주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거 역차별 아닌가..? 다른 일본인 학생들에게 미안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대놓고 나를 배려한 자리배치였다. 그 해에 우리 반에는 개학식에 전학 온 나 이후로 3명이나 전학생이 왔었는데, 그들에게는 이러한 배려는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3명의 전학생 중 한 명은 담임선생님과 다른 학생들의 유별난 관심을 받고 있는 한국에서 온 이방인을 질투해서 이방인의 실내화를 감추는 일도 있었다. 체육 수업을 체육관에서 할 때에는 실내화를 실내 운동화로 바꿔서 신고 들어갔는데, 수업이 끝나고 신발장으로 가면 내 실내화가 안 보이는 것이다. 이런 적이 두세 번 일어났었는데, 처음에는 당황스럽고, 어안이 벙벙했지만, 직감으로 범인이 누구인지 예측할 수 있었고, 나중에는 내 손으로 범인을 잡았다. 버리거나 엄청 구석진 데 감추거나 한 건 아니었고, 금방 찾을 수 있는 곳에 있긴 했지만, 참 황당하면서도 '그래... 네가 그러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라고 그 당시에도 생각을 했었던 거 같다. 말은 제대로 통하지 않았지만 그만큼 담임선생님이 나를 예뻐해주고 계신다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에 가기 전에 일본어의 가장 기초 문자인 히라가나 50음도를 알고 있었다. 한국어로 치면, 가나다라마바사... 만 알고 있었던 셈인데, 일본에 가기 전만 해도 이 50개 음만 알면 나의 이 유창한 일본어로 모든 사람과 소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수업을 전혀 따라갈 수가 없었고, 선생님께서는 방과 후에 따로 남겨서 히라가나 쓰기부터 가르쳐주시기 시작하셨다. 그것과 동시에 본인도 학생을 이해해야 한다면서 NHK 새벽 라디오 방송을 활용하여 한국어 공부를 시작하셨다. 점차 우리 교실 벽에는 한국어 단어가 크게 인쇄되어 붙여져 있었고, 반 학생들이 한국어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나에게 한국어로 말을 걸 수 있게끔 해주셨다. '웃는다' '손을 쫙 핀다' '걷는다' 이런 단어가 붙어있었던 게 생각이 나는데, 아마도 한국에서 온 소녀가 원래부터 내성적이라 낯도 가리는 데다가 말도 못 하고 조용히 있었기 때문에, 당당히 허리를 펴고 씩씩하게 걸으라는 응원의 메시지였을 것이다. 고소공포증이 있었던 선생님께서는 나의 고국에도 가봐야 한다며, 공포증을 이겨내시고 동료 선생님들과 함께 방학을 이용하여 서울에도 방문하셨다. 그리고 그 후로는 비행기를 안 타셨다고 하셨다.


 선생님께서 나를 특별히 챙겨주시는 것에 대해서 의구심을 가진 적이 없었고, 한국에서 온 전학생을 담임으로서 챙기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라고까지 어찌 보면 참으로 뻔뻔하게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그런 좋은 선생님을 일본에서 첫 담임 선생님으로 만났다는 사실에 자랑스럽기만 했었는데, 나중에 교사가 되고 나서야 고바야시 선생님의 헌신과 사랑을 되돌아보니, 도대체 왜 그러셨는지 이해할 수 없는 무조건적인 것이었음을 깨달을 수 있게 되었다.  


노른자~~

 언제는 몇 명의 친구들이 쪼르르 달려와 '노른자~ 노른자~'해서 도대체 무슨 말인가 어리둥절했던 기억이 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놀자~'라는 말을 받침 ㄹ 발음이 안 돼서 노른자로 들렸던 것이었다. 그 당시 일본에는 いじめ(이지메)라는 사회 문제가 크게 화두가 되고 있었는데, 이른바 왕따를 뜻한다. 집단주의인 일본 문화에서는 튀면 집단 따돌림의 대상이 되기 쉬웠다. 바로 옆 나라인데도 불구하고, 그 당시에 내 친구들은 '한국은 어디야?' '한국에서는 대만어를 쓰는 거야?' '한국은 지금 몇 시야?' 등 어처구니없는 질문을 내게 하곤 했었는데, 무식해서라기보다는 정말로 한국에 대해서 관심이 없어서 몰라서 그랬던 것이다. (지금은 일본 내에서 한국의 위상이 높아져서 한국 문화를 좋아하고 한국어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정말 많아서 참 뿌듯하고 기쁘다) 몇 년 후 좀 커서 일본어를 곧잘 하게 돼서 생각했을 때 내가 얼마나 이지메 대상으로 적합했을지 생각하면 아찔했다. 담임 선생님이 나에게 관심과 사랑을 쏟아부어주시니 아이들도 나를 무시할 수가 없었기에, 이국 땅에서 외롭지 않고 말이 안 통해도 기죽지 않고 학교생활을 잘해나갈 수 있었다.


 일본 초등학교에는 보통 수영장이 갖춰져 있어서 여름의 체육 시간에는 수영 수업이 이루어진다. 그 당시에는 모든 교과를 담임교사가 맡고 있었기에, 선생님 입장에서는 초등학교 3학년이 되도록 물에 뜨지도 못하는 학생을 못 본척 할 수도 없고 업무가 가중되는 처치곤란한 학생이었을 텐데, 수영 특훈까지도 해주셨다. 수영 학원의 도움도 같이 받으며 끝내 자유형 25m를 성공해서 기쁘다는 내 서툰 일본어로 쓴 일기장을 확인하셨을 때는 어찌나 함께 좋아해 주셨는지! 그것뿐만이 아니다. 미혼이셨던 선생님께서는 선생님의 어머님과 둘이 살고 계셨었는데, 그 집에 나와 내 동생을 주말에 불러서 밥도 해먹여주시고, 동물원에도 데려가시고, 할머니와 함께 おはぎ(오하기)라고 하는 일본 찹쌀떡도 만들어주신 것이 생각이 난다. 나중에 내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직장 동료들과 함께 나고야를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할머니가 만들어주셨다며 같이 먹으라고 おはぎ(오하기)를 손수 만들어서 갖다 주셔서 동료들 앞에서 어깨가 으쓱한 적이 있었다. 학년이 올라가서는 같은 반으로 만날 수는 없었지만, 초등학교 졸업 이후에도 선생님의 친척 분들과 함께하는 설날 맞이 떡 치기에도 나와 동생을 불러주셔서 같이 체험할 수 있도록 해주셨고, 나의 중학교 입학, 고등학교 입학을 지켜보셨으며, 아예 한국으로 들어온 이후에도, 결혼을 하고 나서는 남편과 같이 나고야로 가서 선생님 집에서 머물기도 하였으며, 신기하게도 선생님과 같은 날에 태어난 아들도 좀 컸을 때 나고야로 데려가 인사를 시키며 인연을 이어갔다.  




 올해 첫 시간에도 나는 나의 자랑스러운 은사님 고바야시 선생님 이야기를 학생들에게 할 것이다. 담임 반에서는, 고바야시 선생님에게 받은 사랑을 똑같이 줄 수는 없겠지만, 사랑도 받아본 사람이 사랑할 줄 안다고 선생님도 너희들을 이만큼 사랑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보겠다는 말을. 그리고 수업 시간에서는, 우리 한국 사람이 어쩔 수 없이 막연하게 가지고 있는 일본과 일본인에 대한 선입견들이 있지만, 선생님은 일본에서 생활하면서 좋은 선생님과 좋은 친구들을 만나 일본이 싫지만은 않다고... 너희들도 아무 이유 없이 일본을 싫어하지만은 말고, 객관적인 균형 잡힌 생각을 가지고 일 년 동안 즐겁게 일본어 공부를 해나가 멋진 미래의 글로벌 리더가 되길 바란다는 말을 할 것이다.


 국경을 넘어 참 사랑을 베불어주신 고바야시 선생님, 부족한 제가 새학기를 맞이할 때마다 마음을 다잡을 수 있도록 길잡이가 되어주시니 감사해요.

 한없이 부족하지만 선생님 흉내 내가며 앞으로도 살아갈게요.


겨울방학에 고국에 돌아간 한국 제자를 보러 (목숨 걸고?) 오신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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