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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CI May 25. 2024

오늘의 날씨

부러운 것들




어제의 내가 낯설다. 인간이 자연의 일부가 아니라 자연 자체라는 사실을 알겠다. 나는 날씨만큼 무상하다. 오늘의 나는 40년 정도 매일 변해서 지금 요 모양을 갖추게 되었다. 이 글을 쓰는 와중에도 변하고 있다. 근데 그렇게 실컷 변해놓고는 또 열여섯 살 때 나를 떠올려 보잖아? 별반 달라진 게 없는 거야. 너무 재밌어. 설마 나만 이렇진 않겠지.


오늘 내 일상의 배경화면은 그랜드 티탄(The Grand Teton National Park). 어디 특별한 데 왔건 말건 일상은 일상이다. 배경화면 달라진 정도랄까. 설산을 바라보며 깊은 물을 가로지른다. 물이 매우 차갑다. 맑고 잔잔해서 호수 바닥까지 보이는 이런 물은 아름다움을 넘어서서 무섭다. 서로 아무것도 숨길 재간이 없다. 패들도 본의 아니게 공손하게 들어간다. ‘무서운 예쁨’을 살면서 여덟 번 정도 느껴 본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날씨니까 오늘의 나만이 할 수 있는 말, 그런 말을 쓰고 있다. 방금 패들링을 마치며 맨발로 느낀 자갈의 촉감, 동사 직전으로 벌게진 내 발바닥을 향해 뜨겁게 바싹 말라있던 둥근 자갈들. 그런 것들을 밟을 때면 세상 부러울 게 없다. 안 그래도 부러운 게 잘 없는데 자갈들까지 이러고 나오면 정말이지 부러울 게 없다. 나는 살면서 뭐가 부러웠을까. 갑자기 한번 적어보자. 작년 이맘때 이런 식으로 적어 본 기억이 난다.


1991

온 세상이 캄캄하게 잠들었다. 사람들은 밤이 되면 다들 잘 자는 것 같은데, 나는 그렇지 못해서 부럽다.


1992

집에 이모가 놀러 왔다. 엄마는 이모한테 자기가 잠시 집 비운 동안 이것도 해 놓고 저것도 해 놓으라고 시켰다. 이모는 '어, 알았다 언니야~! 갔다 온네이~!'했다. 연희는 귀엽고 카리스마 있다. 나도 커서 저렇게 되면 좋겠다.


1995

큰 언니가 유럽에 갔다. 나는 아직 어려서 저런 결정을 맘대로 내릴 수가 없다. 부럽다.


1997

텔레비전에 내 또래 여학생이 나와서 영어로 토론을 한다. 얼굴은 나랑 비슷하게 생겼는데, 미국사람 같다. 나도 영어 저렇게 잘하고 싶은데.


1999

윤리 선생님이 마음에 든다. 무기력한 표정으로 요점만 말씀하신다. 너무 재밌다. 수업 끝나고 자꾸 찾아가서 물었다. 물어보는 것마다 다 아는 선생님이 부럽다.


2002

대학교에 와 보니 사람들이 서울말을 한다. 서울말은 너무 보들보들해서 대답을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다. 나도 언젠가 서울말을 할 수 있겠지.


2003

2003년에 내가 뭘 하고 있었을까? 캐나다에 있었다.


방금 날씨가 변했다. 그래서 대략 '내가 부러워하던 것들을 이제 부러워하지 않는다' 정도로 마무리를 지어본다. 나의 부러움을 바라보는 일은 내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 있는 원초적인 방법 중 하나였다.




The Grand Teton National 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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