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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과 또 다른 현실

define real

by ACCIGRAPHY




시차로 밤낮이 바뀐 탓에 생생한 꿈을 많이 꾸고 있다. 전반적으로 괴로운 가운데 나름 재밌는 면도 있어서 이 또한 지나가리라 마지막까지 즐겨보리라 새벽 3시에 터키에서 사 온 커피를 홀짝이며 글을 쓰는 중.


이스탄불에 다녀온 나는 커피와 홍차를 즐기는 사람이 되었다. 아침에 녹차 우리던 나는 작년 12월 말에 시작하여 올해 4월을 기점으로 사라졌고, 영롱한 초록의 모든 아침은 나에게 유일무이한 기쁨을 선사했다. 그리고 지금 내가 마시는 커피는 언젠가 내가 끊었던 커피가 아니고, 엄연히 새로운 사랑의 시작이다.


새 얼굴을 한 오늘이 턱 하니 와 있으므로, 부득이하게 매일 매 순간 새로운 자명을 따른다. 그러면 어제의 결론에 발목 잡히지 않게 된다. 나의 현 상태와, 해야 할 일과, 주변 상황을 예민하게 주시하면서 그에 따라 끊임없이 행동을 수정해 나간다.


4월부터 나의 삶에는 커피와 홍차가 가미되는 게 더 말이 된다고 내 안의 무언가가 말했다. 얼마나 갈지는 모른다. 삶은 가장 적절한 시기에 내가 알아야 할 것들을 알게 해 주었기에, 그걸 믿고 가다 보면 내 삶의 본말本末이 저절로 드러났다.


내 삶의 본말은 단순하다.


은 내 본성대로 사는 일이고, 말은 그에 따른 부차적 옵션들이다.


본성에는 영과 혼의 두 가지 차원이 있다. 영의 본성은 사랑이고 혼의 본성은 개성이다. 사랑에 힘입어 개성을 드러내는 일이 내 삶의 본이고, 그것을 위해 대학원을 갈지 독학을 할지, 커피를 마실지 녹차를 마실지 선택하는 일이 말이다. 본에 관한 사항은 쉽게 바꾸지 않는다. 말은 유연하게 바꿔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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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간밤에 꿈에서 만난 사람은 데이비드 초이(david choe, 한국계 미국인 화가)였다. 부랑자 같은 외양에 형형한 눈빛을 지닌 그와의 대화는, 땀을 뻘뻘 흘리며 놀던 어린 시절 여름 놀이터 같았다. 이야기가 절정으로 치닫던 와중에, 그는 뭔가 결심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벌떡 일어섰다.


"너 지금 위아래로 베이지 트레이닝 입었잖아, 등판에 뭐 그리면 재밌을 것 같은데 그려도 돼?"


"어어! 너무 좋아!"


나만을 위한 데이비드 초이 커스텀 트레이닝. 나는 조신히 등판을 내주었다. 스프레이캔으로 그릴 줄 알았는데 어디서 페인트건을 가지고 와서는 총천연색의 물감을 내 등판과 다리에 쏘아댔다. 압이 상당해서 휘청휘청 중심을 잡으려 하는 와중에 잘하고 있나 거울로 반사된 내 뒷모습을 체크하는데, 투박한 미디엄으로 후드 부분의 디테일까지 처리해 내는 걸 보고 역시는 역시구나 감탄하는 와중에 귀와 입에 페인트가 잔뜩 튀었다. 눈썹이랑 귀밑머리도 축축해진 게 너무 웃겨서 고개를 숙인 채 실실 웃고 있는 나를 보고 그가 말했다.


"마음에 들어?"


"어, 완전!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 너 배고파?"


"어!"


대답과 동시에 그의 오른쪽 입 꼬리가 살짝 치솟더니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 뭐야?"


"아니... 내 주변에 나 밥 사주는 사람이 없거든. 유명해지고 나서 아무도 나한테 밥을 안 사. 내가 사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는지... 나는 이렇게 가끔 밥 얻어먹고 싶은데."


유명해져 본 적 없어도 그 마음 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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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까지 생생한 꿈을 꾼 날이면, 귀밑머리 축축한 게 이 정도로 자세하게 느껴지고, 꿈에서 만난 누군가와의 대화로 내 관점에 일말의 변화라도 일어나는 날이면, 우리가 부르는 현실이라는 세계를 갑자기 뭐라 불러야 할지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매트릭스에서 모피어스가 'real? what is real?'이라고 했던 장면도 생각나고.




nine suns on my left h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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