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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한번 만난 사람

나비소년

by ACCIGRAPHY




램즈이어 작가님의 동화 '나비를 사랑한 소년'을 읽으면서, 22년 전 길에서 만났던 한 청년이 생각났습니다. 호기심 많고 순수한 동화 속 나비 소년이 제가 살면서 딱 한번 만났던 그 청년과 분위기가 너무 닮아있었거든요.


그 사람을 만났던 2003년 여름으로 돌아가봅니다. 당시 저는 교환학생으로 캐나다에 있었는데, 여름 방학 기간 동안 친구들과 유럽에 있었어요. 그럼 지금부터 당시의 시점으로 써 보겠습니다.




그라츠(Graz, Austria)는 우아한 곳이다. 문방사우를 짊어지고 땀을 삐질거리며 앉을 곳을 물색하자니, 나도 모르게 주눅이 든다. 옷을 너무 대충 입은 것 같다. 갑자기 기분이 다운된다.


사람들의 표정과 걸음걸이에서 풍기는 삶의 여유. 멋진 수트에 맨발로 구두를 신은 한 백발 신사가 아이스크림을 한입 베어 물고는, 아내로 보이는 여성을 바라보며 웃는다. 할아버지는 부와 명예를 감추느라 맨발에 살짝 헝클어진 백발을 택했고, 비로소 스타일이 완성되었다. 아름다웠다. 저걸 다 먹고 나면 오페라를 보러 가겠지. 부럽다.


하지만 내겐 부러움을 이기는 무기가 있다. 어서 빨리 자리를 펴서 글씨를 쓰고 싶다는 열망. 길 위에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글씨만 바라보며 붓을 놀리다 보면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고, 이야기가 시작되고, 무대가 펼쳐질 것이라는 믿음.


적당히 분주하고 한산한 스팟을 찾았다. 나는 마치 평생 그 자리에서 글씨를 써 온 사람 마냥 자연스레 판을 펼치고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고, 이야기가 시작되고, 무대가 펼쳐졌다. 나와 비슷한 결로 미친 자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고, 하루 종일 신나게 놀았다.


사람들이 다 떠나고, 더 이상 완벽한 하루가 있을 수 있을까 생각하며 마지막 글씨를 마무리하던 순간, 하나의 시선이 느껴졌다. 누군가 내 앞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는데, 서양인들이 잘하지 않는 자세인지라 속으로 희한하다 생각하며 고개를 들었다.


새파랗고 형형한 두 눈에 허리까지 내려오는 드레드락이 이질적으로 어우러진, 청년이 되어가는 한 소년이었다. 마치 '신비롭다'는 형용사의 현현 같았다. 바닥에 깔아놓은 글씨들 중 하나를 가리키며 그가 입을 열었고, 자연스레 대화가 시작되었다.


"이게 뭐야?"


"나비."


"나비? 이 글씨의 뜻이 나비야?"


"어. 나비라는 뜻이고, 글씨체도 나비체야."


"정말? 나비체? 이거 나 해도 돼?


"어. 너 가져."


"정말? 진짜 나 해도 돼? 정말 고마워. 근데 나 돈이 없는데?"


"괜찮아."


"내가 나비를 좀 심각하게 좋아하거든. 평생 간직할게. 근데 너 이렇게 길에서 글씨 쓰면서 여행하는 거야? 위험하지 않아?"


"위험하지. 근데 나는 믿는 바가 있어."


"믿는 바? 오, 나도 믿는 바가 있는데."


"너는 뭐 믿는데?"


"나는 내가 위대해질 수 있다고 믿어. 요즘은 요가난다에 꽂혀 있고."


"요가난다? 그게 뭐야?"


"내가 좋아하는 요기야."


-


그렇게 우리는 어둠이 내려앉을 때까지

온통 사소하고 심오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꼭 다시 만나자며 헤어졌다.




그 친구 덕에 저는 요가난다(Paramahansa Yogananda, 인도 요기)를 알게 되었고, 저는 그에게 장자(莊子)를 소개해 주었습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새로이 무언가에 꽂힐 때마다 장문의 이메일로 공유하면서 서로 얼마나 위대해졌는지(!) 확인하곤 했어요.


그러다 2016년, 목동에 작업실을 열었을 때, 그 친구가 축하한다고 사진을 하나 보내왔습니다. 꾸준히 글씨를 써 줘서 고맙다고, 나비가 책상 위에서 아주 잘 지내고 있으니 너도 잘 지내라고.




램즈이어 작가님의 원글: https://brunch.co.kr/@fa55272ce44d455/314


참고로 이 청년에 관해 처음 발행되었던 글입니다:

https://brunch.co.kr/@acci-graphy/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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