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체의 탄생, 댓글 동화
독일 베른에 나비를 사랑하는 어느 소년이 살고 있었다. 아마도 지구상에 이 소년만큼 나비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어린이는 없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아이가 장차 제2의 파브르가 되려나 했는데 가만 지켜보니 다른 곤충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소년은 아무리 낯선 숲이나 계곡에서도 갑자기 날아가는 나비의 이름을 척척 알아맞혔다. 그중에서 주인공의 마음을 가장 사로잡은 종(種)은 호랑나비다. 소년이 스러져가는 나비 애벌레를 발견하고 집에 가져와 귤잎을 먹인 후 살려낸 적이 있다. 호랑나비 한 마리를 놓칠 수 없다면서. 소년의 곤충 상자에서 번데기와 고치를 거쳐 호탕한 나비 한 마리가 비상했을 때 온 식구들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어떻게 호랑나비인 걸 알았어?”
어머니가 뚜렷한 줄무늬에 감탄하며 물었을 때 소년은 쉬운 일이라는 듯 빙긋 웃었다.
“머리 부분이 왕관처럼 각이 지고 기품 있으면 호랑나비 애벌레예요.”
그해 11월 하순 어느 날 하교 길의 소년은 커다랗게 외치며 대문에 들어섰다.
“엄마! 엄마!”
“무슨 일이야?”
“세상에서 가장 예쁜 나비를 봤어요.”
“늦가을에 웬 호랑나비?”
“딴 종류요. 무슨 나비더라? 네발나비도 아니고 왕오색도 아닌데…” 꼬마 나비 박사도 그날 보았던 나비 이름은 알 수 없었나 보다. 이후로 날마다 소년은 그 나비 이야기만 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분홍색 가까운 빛깔을 띄고, 호랑나비만큼 크지는 않지만 날개 짓이 더 우아하다며.
며칠 후 일요일, 정원에서 동화책을 보던 소년이 어머니를 불렀다.
“엄마! 엄마!”
“무슨 일이니?”
“그 나비가 책을 읽어요.”
“무슨? 테이블의 들꽃 때문이겠지?”
“아녜요. 꽃 근처에는 가지도 않아요. 글씨를 읽는다니까요?”
소년은 저녁을 먹으며 엄마가 나오지 않았다고 투덜댔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비가 글자 위에서 더듬거리는 것을 봐야 했다면서.
어머니께 그 나비 이야기를 할 때 소년은 제일 신났다. 종(種)을 알려고 곤충도감도 열심히 뒤적이며.
“엄마, 도통 이름을 알 수가 없어요. 각시멧분홍나비도 아니고 들신선도 아니고.”
“네가 이름을 지어보렴. 최초 발견자일 수도 있어.”
어머니는 나보코프 박사가 그랜드 캐년에서 발견한 나비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함께 걷던 학생 도로시의 발치에서 날아올라 이름이 도로시 새터(Dorothy's Satyr)가 되었대.”
소년은 마음이 부풀었다. 그 나비를 한번 찬찬히 보기만 하면 어떤 이름을 지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후로 소년은 그 나비를 보지 못했다. 어머니는 날마다 학교가 파한 후 아이가 징징거리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엉엉. 오늘도 못 봤단 말에요.”
“겨울 나비가 아닌가 보다. 날씨가 추워졌잖아.”
소년은 집에서도 해가 지도록 ‘내 나비, 내 나비’하며 정원을 서성거렸다. 어머니는 소년이 걱정되어 곤충 식물원 같은 곳에 가서 비슷한 나비를 찾아볼까 하는 궁리를 했다.
갑자기 기온이 영하로 떨어진 주말, 기분전환 겸 겨울 준비를 하러 어머니는 소년을 데리고 아케이드가 즐비한 시내로 나갔다. 작년에 아이가 잃어버린 털장갑을 마련할 참이었다. 붐비는 사람들 틈에서 소년의 기분도 조금 나아 보였다.
“엄마, 저기 가 봐요.”
“너 손 시리잖아? 장갑부터 사야 하는데…”
여기저기 가게 쇼윈도를 살피는 어머니와 다르게 아이는 분수대 근처 사람들이 빙 둘러선 곳을 가리켰다. 동양인 젊은 여성이 바닥에 종이를 깔고 무채색의 드로잉을 하고 있었다. 짧은 시간에 후루룩 뭔가를 완성하고 어떤 사람에게 건네고 그럴 때마다 환호와 갈채가 터져 나왔다. 한쪽에는 차례를 기다리는 작은 줄도 생기며.
어머니는 여대생의 참한 얼굴과 하늘거리는 손동작을, 소년은 하얀 종이 위에 피어나는 묘한 선들을 한참 바라보았다.
“우리도 네 이름을 그려달라자.” 어머니는 영어를 잘 모르지만 눈치로 돌아가는 상황을 알 수 있었다. 흘러가는 스케치는 어느 나라 문자를 흉내 내는 거 같고 사람들이 그 언어로 뭔가를 적어 달라 부탁한다는 것.
화가 비슷한 학생은 그동안의 즐비한 요청에 힘이 부쳤음에도 모자(母子)를 환대했다. 어머니에게 이름 스펠링을 확인한 뒤 소년을 다시 한번 바라보고 눈을 찡긋하며 웃어 주었다.
소년은 그 미소에 벙벙했다가 곧 부드러운 종이 위에 펼쳐지는 팔의 춤사위에 정신이 팔렸다. 어머니도 아들의 이름이 신비한 필체로 그려지는 것을 골똘히 바라보았다.
“엄마!”
갑자기 소년이 소리 질렀다.
“왜?”
“그 나비가 나타났어요!”
“뭐?”
“방금 저 하얀 종이 위에서. 날아갔단 말에요!”
“그래? 그래~”
어머니는 길거리 작가에게 고맙다고 인사하랴, 헛것을 본 아들에게 대꾸하랴, 부드러운 종이를 고이 들고 가랴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어머니 손을 잡고 걸으며 소년은 기분이 좋은 듯 쉴 새 없이 조잘거렸다.
“엄마! 그 나비가 뭐라고 한 줄 아세요?”
“나비가 말도 했어?”
“네. 제 손목이 얼어서 막 풀었는데. 그때 그분도 손을 털고 ∞ 모양 비슷한 것을 그렸거든요?”
“그런데?”
“그때 나비가 거기서 훠울 날갯짓을… ”
“그래?”
“나비가 나를 씩 봤다고요! 할 말이 많아 보였어요.”
“오홍~ 그랬어?”
"추위도 재밌다고 하고. 그리고 분명 말했어요. '나는 살아 있었다'고.”
“그랬구나~”
무명 예술가에게 받은 선물로 소년은 그동안의 속상함을 잊어버린 것 같았다. 어머니는 적이 안심되어 공부방 책상 위에 작품을 잘 붙여 주었다. 소년은 까맣게 흘러가는 자기 이름 철자를 보고 또 보았다. 마치 그 나비가 다시 나타나기라도 할 것처럼.
아니나 다를까 저녁에 또 소년의 외침이 들렸다.
“엄마, 엄마! 생각해 냈어요!”
“뭘?”
“나비 이름요. 나비체로 해요. 나비체!”
“나비체?”
어머니는 낯설기도 하고 들은 적 있는 것 같기도 한 그 소리를 생각하다가 여학생이 모인 이들에게 뭐라고 하던 장면이 떠올랐다. 스케치를 설명하던 말 중에서 한마디 알아들을 수 있는 영어 ‘버터 플라이’에 이어서 여러 번 들린 단어였다. 알 수 없는 언어지만 어린것도 되풀이되는 그 음절이 마음에 와닿았나 보다.
‘나비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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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cigraphy 작가님의 [작은 글씨] [붓의 유목] 두 글을 읽고 써 본 동화입니다. 많은 표현들을 그 본문과 댓글에서 빌렸습니다.
https://brunch.co.kr/@acci-graphy/555
https://brunch.co.kr/@acci-graphy/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