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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과 목단꽃

[대야장 목단꽃 보고서] 댓글 동화

by 램즈이어

“곱게 접은 자주색 생(生)이여!”

정신이 점점 희미해져 갈 때 누군가의 속삭임을 들었다. 생각이 조금 맑아졌다.

‘내게 하는 말인가?’

가까스로 눈을 떠보니 평범한 차림새의 중년 아주머니가 나를 찬찬히 들여다보고 있다.

'아, 이분은 시인일까? 그렇다면…'

아침부터 펼쳐진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오늘 내 꽃잎사귀는 최고로 색이 곱고 풍만하지 않았던가. 이슬에 맺혀 있을 때 새벽 일찍 깨어난 화단 식구들이 앞 다투어 칭찬했다.

“노랑나비가 다시 찾아올 거야.” 철쭉의 귀띔에 으쓱해져서 오늘이라면 장미의 도도함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다.

"메이퀸에도 도전해 보지?" 분꽃은 분에 넘치는 이야기도 꺼냈다. 메이퀸이라. 사람들은 늘 장미가 오월의 여왕이라고 하지 않나? 내가 좋아했던 노랑나비도 장미에게 푹 빠져 며칠 째 소식 없는걸? 하지만 오늘이라면 이 모든 상황을 바꿀 수 있을 것만 같다. 이런 날은 넓은 세상 한복판에 나가 한번 빙그르르 돌아야 하는데. 그러면 뭔가 좋은 일이 생길 텐데.

그런데 이렇게 속절없이 스러질 줄이야.

늘 상 토닥토닥 싸우는 어르신네 화단에서 태어날 때부터 낌새가 이상했다. 그분들은 우리의 자태를 칭찬하는 것인지 비웃는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다.

"주먹만 한 것들이 불쑥불쑥 마당을 뒤덮네~"라고 야단을 치지 않나.

"웬 붉은 환호성이여~" 하며 핀잔을 주질 않나.

하지만 노랑나비가 나를 떠나던 날, 그날은 할머니가 족집게처럼 내 맘을 읽었다.

"하고 싶은 말 애타도록 있어 이렇게나 붉고 커다란겨?"


결국 아침나절 우리 자매들은 꽃 모가지 뚝뚝 끊겨 대야장 짐꾸러미에 실렸다.

"피고 지는 내내 마음 서성거렸구먼. 눈 저리도록 혼자 실컷 보면 될 것을. 장터 한쪽 불그죽죽 물들이고 싶은 겨?"

할머니 잔소리를 못 들은 척 어르신은 묵묵히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우리는 왜 오일장에 가는 걸까? 어르신네 채소들 한 곁에 하느작 매달려 가는 신세. 집에서 가까운 골목 난전에 판을 벌이고서야 중얼거리는 혼잣말이 들린다.

"하고 싶은 말 다하고~듣고 싶은 말 원 없이 들어 보라고~"

아내에게 하는 말인지 우리에게 하는 말인지 알쏭달쏭하다. 오늘 우리 임무는 팔리는 것인가? 장식하는 것인가? 장터는 시끄럽고 눈길들은 다채롭다. 넓은 세상이란 이런 것일까? 벌써부터 화단이 그리워진다. 그 서늘한 돌담 아래서 조용히 꽃잎을 펼치던 때가.

“그 꽃 한번 푸짐하네~”

“뭔 꽃이 저렇게 크댜?”

"막걸리 한잔 거나하게 걸친 자네 얼굴 닮았네 그려."

우리를 바라보며 사람들이 한 마디씩 뱉는 말은 어르신네와 크게 다를 게 없다. 노랑나비가 떠날 때 보다도 더 자존감이 떨어진다. 어머니가 하시던 말을 되새기며 마음을 추스르는 수밖에.

"우리 조상은 이래 봬도 영랑의 뮤즈였단다. 시인을 설움에 잠기게 하는 족속이지."

곁에 있던 이모도 거들었다.

"중국 양귀비의 자태도 우리와 비교했어."

어머니의 유언처럼 시인을 만날 수 있다면.

"꼭 시인을 만나렴. 네 삶이 더욱 빛나게 될 거야."

그 모든 이야기가 빈말이었을까? 시인과의 의미 있는 만남은 영랑에서 끝났는지 모른다. 누구 말씀처럼 그냥 지금 이토록 붉으면 되는 거겠지.

"아무도 목단꽃 사는 사람이 읎네. 당최 이 사람들 꽃 볼 줄 몰라 다들~"

어르신은 우리에게 물 한 모금 주실 생각은 안 하고 푸념이다. 우리는 팔리는 거였구나. 그 속상함도 잠시 이제는 목이 말라 기진하다. 시인 같은 아주머니를 만났건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점점 모든 것이 흐려만 간다.

몽롱한 시야 가운데 팔랑거리며 다가오는 노랑나비 한 마리. 이제 마지막 꿈 길인가?

"목단아. 목단아!"

"으응. 나 졸려. 금방이라도 눈이 감길 거 같아."

"정신 차려 목단아. 네가 메이퀸이 됐단다."

"무슨 뚱딴지같은…. 너 장미한테 할 얘기 헷갈린 거지?"

"아냐. 내가 분명히 봤어. 시인이며 화가이신 분이 네 모습을 그렸는데. 그게 뽑혔다고."

"으응. 그래? 그럼…. 엄마 말대로…."

"너~ 5월 19일 브런치 월드의 메이퀸이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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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9일 호랑 작가님 글 [대야장 목단꽃 보고서}를 읽고 적은 댓글 동화입니다. 많은 표현들을 거기서 빌렸습니다.

https://brunch.co.kr/@qkfkagksmfwlrl/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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