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적 자유(나만의 경제적 자유 기준은 32평 아파트 대출 없이 샀을 때이다. 다른 사람과 기준은 다르다)’를 이룬다면 친구들에게 주고 싶은 선물이 있었다. 그중 하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비용을 다 대는 여행 함께 가기’였다. 2021년 12월 드디어 28년 만에 내 집다운 내 집을 마련했으니 ‘나만의 경제적 자유’를 이룬 셈이 되었다. 선물을 준비해야 하는데 자꾸 미루는 나를 보고 좀스러워 내가 나에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가 결정했다. 이번 달부터 시작하자고.
첫 번째 함께 할 사람은 혜숙이였다.
친구 혜숙이는 중학교 1학년 때 만나 지금까지 만나기만 하면 너무 웃겨서 눈물을 흘릴 만큼 재미있는 나의 친구 1호다.
나는 혜숙이를 생각하면 입꼬리가 올라간다. 생각만 해도 나를 행복하게 해 주고 유머가 남다른 친구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중학생 때 하루에 버스 5번 운행되던 시골 동네 오일장 노래자랑에서 최우수상을 받아 밥통을 거머쥔 우리 동네 명가수였다. 음악을 사랑하고 특히 노래 부르기를 좋아해서 늘 흥얼거리던 혜숙이는 자연스럽게 대학은 성악과를 입학했다. 졸업 후 시립합창단에서 노래를 부르다가 노총각 지휘자님의 눈에 쏙 들어 결혼까지 한 화끈한 사랑꾼이기도 했다. 사랑만 화끈한 것은 아니고, 부모님에 대한 효심도 화끈했다. 친정어머님이 돌아가시고 연로하신 친정아버지를 3년 동안 모시기 위해 친정집으로 합가 했고, 임종 때까지 세끼 밥상을 차려준 효녀 중의 효녀다. 나는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는 친정엄마를 딱 열흘 모시면서 대상포진에 걸리고 눈병이 나서 몇 주간 병원을 다녀봐서 안다. 어른 모시는 것이 쉽지 않음을. 친정아버지를 3년을 모신 혜숙이를 보면 존경스럽기만 하다.
2022년 11월 11일 혜숙이와 나는 1박 2일 서울여행을 하기 위해 우리 집 근처 버스터미널에서 만났다. 등산 차림에 운동화를 신고 오라는 메시지에도 불구하고 우리 멋쟁이 친구는 친정아버지께 효도했다고 잘 사는 둘째 언니가 사준 루이뷔통 가방을 떡하니 들고, 큰 쇼핑백을 든 채 나타났다.
‘서울여행은 대중교통을 이용해야지’라고 생각하고 가벼운 등산 가방에 잠옷 한 벌, 양발 1개, 속옷 1개를 챙겼던 나는 빠르게 결정해야 했다.
혜숙이 언니가 친정아버지 3년 모신 상으로 사준 루이비똥가방
‘루이뷔통 가방 들고 지하철 탈 순 없지. 차를 갖고 가자.’
“쇼핑백에는 뭐 들었어?”
“대추 맛있어서 지인한테 어렵게 부탁해서 한통 사 왔어. 너네 신랑 줘. 그리고 내가 가는 단골집에서 너 학교에서 입으면 좋은 조끼 하나 샀어?”
“그래? 고마워.”
“저녁은 삼청각에서 먹자.”
“거기서 차는 마셔봤는데 경치가 끝내줘. 밥은 못 먹어봤어. 정말 거기로 갈 거야? 친구 잘 둬서 행복하다. 이 무슨 횡재냐. 호호호”
“야! 나 50살 넘어서 집 산 여자야! 왜 이래!”
“잘났다. 50 넘어서 집사구. ㅋㅋ 친구야, 나 요즘 뭐 하는 줄 아냐? 하나님이 나 요즘 살맛 안 난다고 너를 나한테 보내줬나 보다.”
“왜 무슨 일 있어?”
“나 요즘 고구마 고르러 다녀. 거기다가 더 비참한 건 오징어 게임 같은 옷을 입고, 모자를 두 개 쓰고 하루 10시간 서서 일해서 11만 5천 원 벌어.”
“뭐라고? 네가 그런 일을 한다고?”
“이 우아한 얼굴에 고개 처박고 고구마 나쁜 것 고른다고 생각해봐. 더 걱정은 고개 너무 숙여서 목에 주름 갈 것 같아서 저녁에 퇴근하자마자 목을 막 쳐서 올린다니까.”
“농장에서 일해?”
“아니, 신세계백화점 납품하는 케이크 만들 부재료 분류하는 일이야. 난 돈을 써야 피가 도는 사람인데 마스크 쓰고 온종일 입 꼭 다물고 일하다 보니 노래가 더 잘 나오네. 교회 성가대 식구들이 놀라 자빠져” 그러면서 가을 노래를 구성지게 불렀다.
‘돈을 써야 피가 돈다’라는 말이 너무 웃겨서 우리 둘은 박장대소했다. ‘오징어 게임 유니폼’을 입은 혜숙이를 생각하니 너무 웃기고 자신을 자학하면서도 목주름 걱정하는 친구가 귀여웠다.
그렇게 차 안에서 우리는 서로의 일상을 나누며 음식점 ‘삼청각’에 가니 오후 5시였다. 저녁 식사는 6시부터라고 해서 할 수 없이 북악산 둘레길을 30여 분 걷고 가을 단풍 아래에서 사진 모델이 되어 둘이 놀았다. 해가 짧아 예쁜 나무들이 어둠에 가려지는 것이 아쉬웠다.
삼청각 가격은 점심은 5만 원이라 생각해서 호기롭게 왔더니만 저녁 최저 가격이 9만 원이었다. 첫 여행 코스인데 김 빠지게 할 수 없어서 시켜서 먹었다(혜숙이는 고깃집에 가서 소주 한 잔씩 하자면서 말렸지만). 먹는 내내 시골 촌애들처럼 행복하게 먹었다. 9만 원 가격이 아깝지 않았다. 깔끔하고 담백하며 건강해질 것 같은 다양한 육·해 진미를 난생처음 맛봤다. 후식까지 얼마나 품격 있던지. 돈을 많이 벌어서 한 달에 1번씩은 이런 집에서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과 미리내성지 근처 양식집에서 2만 5천 원이 비싸다고 나가자고 해서 눈을 흘긴 때가 떠올랐다. 내가 9만 원짜리를 먹었다고 하면 어떤 표정일까? 이 글은 못 봤으면 좋겠다.)
삼청각 저녁식사
저녁 먹고 북악 스카이웨이 팔각정에 가서 커피 한잔하며 서울 야경을 보니 가슴에 행복감이 밀려왔다. 혜숙이 언니가 나랑 커피 마시라고 용돈을 보내와서 그 돈으로 따끈한 아메리카노를 야경 보며 마셨다. 젊은 연인들이 많았지만, 우린 우리대로 할 얘기가 너무 많아서 주변에 신경 쓸 수가 없었다.
이때까지는 운전을 많이 했어도 피곤하지 않았다.
그러나 숙소가 있는 명동에 와서 주차장을 찾아 헤매다가 숙소 근처를 7번이나 돌다가 겨우 유료 10분당 1천 원 내는 주차장에 차를 대고 운전으로 만신창이가 되었다. 눈꺼풀이 코까지 내려올 무렵 택시를 잡아타고 숙소에 오니 10시 30분이었다. 내가 잡은 조식 주는 호텔은 호텔이 아니라 INN(여관 급)이었다. 조식도 근처 식당 쿠폰을 나눠주는 식이었다. 이런 조식은 생전 처음이었다. 내가 세상 물정을 너무 몰랐나? 난생처음 호텔을 예약하면서 꼼꼼하게 살펴보지 않은 나의 미숙함으로 인해 호텔급 비용을 내고 조식은 딴 가게로 가야 하는 여관 급 무늬만 호텔에서 하룻밤 묵었다. 다행히 비흡연 숙박 시설이라서 우리 집보다 공기가 깨끗해서 푹 잤다. 자고 나니 6시…. 아침형 인간인 혜숙이가 일어나서 말했다.
“나 먼저 씻을게. 조식은 두어 시간 뒤에 우리 콩나물 해장국 먹자.”
‘괜히 조식 포함으로 선불하는 바람에 2만 원이나 날렸네. 다음부터는 꼼꼼히 읽어야지. 간밤의 주차비용은 또 얼마일까?’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며 10분이라도 차를 빨리 빼서 어디론가 가고 싶었다.
우리는 어젯밤 유료 주차장이 숙소와 500m 떨어진 곳에 있음을 알고 웃었다. 혜숙이도 나와 마찬가지 길치여서 구글 내비게이션을 켜서 주차장까지 이동했다. 헤매지 않고 내 차가 하룻밤 묵은 주차장에 도착했다는 사실이 어릴 때 달리기에서 1등 한 느낌처럼 뿌듯했다. 남편과 딸이 옆에 있을 땐 아이처럼 졸졸 따러 다니기만 했는데, 오늘은 내가 책임 가이드 같아 조심스럽고 걱정이 되었다.
2일 차 여행은 청운 문학도서관에 주차하고 ‘진경산수화 길 걷기’였다. 가을 단풍에 감탄하던 혜숙이는 가을 노래를 메들리로 불러 주어 좋았다. 윤동주 문학관 뒤편에 있는 동산에 있는 작은 야외공연장에 서서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를 불렀다. 그 동네에 사는 바느질 하는 시인(이화동 바늘꽃 시인, 이인희)을 만나 나를 포함한 관객 2명 앞에서 혜숙이는 공연했다. 아주 큰 콘서트 가수처럼 그럴싸했다.
친구의 노래
이인희 작가님은 "시를 쓰면서 다시 사는 것 같다"는 말씀을 해서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노래, 시, 그림' 이것들은 어쩜 가수와 작가들의 분신일지도 모른다.
윤동주 문학관 뒷편 진경산수화 둘레길
걷기는 썩 좋아하지 않는 혜숙이와 근처 석파정과 서울 미술관을 관람하러 갔는데 1시간 후에 다시 오라는 경비의 말을 듣고 인왕산 스카이 길로 드라이브를 했다.
지나가다 보면 만차로 인산인해를 이루던 인왕산 스카이 ‘초소책방’에 오늘 드디어 갔다. 커피 두 잔과 빵 두 개, 책 두 권을 사서 2시간 동안 읽고 그동안 못했던 깊은 이야길 나누었다. 커피맛이 좋고 빵도 맛있고 무엇보다 책을 많이 읽을 수 있는 넓은 공간들이 '초소책방'의 매력이었다. 사람 많은 곳은 나름 이유가 있는 듯.
나는 커피한잔 음미하며 새로 산 책 앞장에 혜숙이에게 편지를 썼다. 참 오랫만이다. 오랜 친구의 앞날을 축원하면 글을 쓰는 시간이. 행복했다.
"혜숙아, 늘 건강하고 행복하렴. 귄한 시간 내서 나와 함께 여행해줘서 고맙다. 오래오래 이 여행을 추억하게 될 것 같구나."
인왕스카이 '소초책방'에서
2022년 혜숙이와 함께 한 서울 여행(삼청각-북악산스카이팔각정-명동INN호텔-명동성당-청운문학도서관-윤동주문학관 둘레길 걷기-인왕산 스카이 초소책방)으로 나는 이번 주말 너무너무 행복했다.
이번 여행으로 어림잡아 60여만 원은 쓴 것 같은데 꼼꼼하게 십 원짜리까지 계산하고 싶지 않다. 백만 원도 안 되는 돈으로 40년 지기 내 친구와 이런 추억을 어떻게 살 수 있겠는가? 대출 없이 사진 않았어도 내 집 있으니 1년에 서너 번은 친구들에게 이런 여행을 선물할 수 있으면 좋겠다.
혜숙이도 나에게 대전여행을 선물한다고 했다.
“아이고, 혜숙아. 그래. 니가 돈을 써야 피가 돈다니 어쩌겠니? 우리 친구 피 안 돌면 안되니까. 다음 달이라도 갈까? ㅋㅋㅋ”
혼자 집으로 오는 길은 서울 시내가 꽉 막혀서 엉덩이가 베겼다.
그래도 혜숙이 이야기가 생각나서 혼자서 웃었다.
“목사님, 저 부자 되고 싶어요. 너무 힘들어요.”
“아이고, 지금도 생각하면 부자이세요. 다시 생각해봐요.”
“생각 말고 진짜 부자 되고 싶다고요. 목사님.”
“집사님, 돈만 많다고 부자 아니에요. 이미 집사님은 부자이십니다.”
걸걸한 목소리로 목사님께 떼쓰는 신도 혜숙이의 말에 쩔쩔매는 목사님의 모습이 떠올라 혜숙이가 없는데도 웃음이 자꾸 나왔다.
친구가 사준 조끼
집에 와서 혜숙이가 사준 조끼를 입어보니 품이 넉넉하고 멋스럽다. 멋쟁이 친구 덕에 월요일엔 멋쟁이가 되어우리반 학생들에게 자랑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