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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파도 Sep 05. 2022

누구에게나 한 번쯤

친애하는 내 감정의 파도에게|Ep.4

누구에게나 한 번쯤


내가 겪는 이런 상황들은 누구에게나 한 번쯤 찾아온다. 우리는 억압된 사회에서 자라났고 성인이 되어서야 비로소 자유를 찾을 수 있는 시스템 속에서 자라났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억제하는 방법을 너무나도 잘 터득하고 있다. 하지만 반대로 자신을 찾아가는 방법에 대해서는 무지한 경우가 많다.


나는 최근 고등학생 친구들의 자기소개서를 컨설트 해주는 일을 하고 있다. 자기소개서를 적어오면 내가 어떤 부분에서 어떻게 적어야 할지 조언을 해주는 일이다. 이 일을 몇 년간 하면서 느낀 점은 아이들은 소개할 '자신'이 누구인지 잘 모른다는 점이다. 그저 학교에서 하라고 했기 때문에, 이걸 해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고 했기 때문에.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 적으라고 하니 아이들은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다. 내가 해주는 일은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던 '자신'에 대해 생각해보는 일이다. 나는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좋아하고, 앞으로 어떤 것들을 해보고 싶은지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는다. 초고를 완성하는 데에는 길지 않은 시간이 걸리지만 퇴고를 하는 것은 오래 걸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나는 아이들을 보며 정신건강의학과에 처음 내원했을 때의 나를 떠올린다. 당시의 나는 (현재도 완벽하게 형성된 것은 아니지만) '자아'라는 것이 존재하는지조차 의문인 상태였다. 그저 다른 사람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인형에 불과했다. 사회가 원하는 인재상에 맞춰 크기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뒤늦게 이것이 불합리하다는 것을 깨닫고 움직이려고 했던 케이스다. 하지만 이미 내 손과 발은 사회에 단단히 묶인 채였다. 정신건강의학과를 내원하며 거치는 상담은 이 묶인 끈들을 풀어내는 과정이다. 끊어내는 것이 아니라 풀어내는 것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자신도 마주하지 못했던 '내면'을 천천히 탐색하면서 내가 가진 가능성을 잘라내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나를 찾는 과정


지금 당신 앞에 빈 종이 한 장을 두고 자기소개서를 써보라고 한다면 무엇을 먼저 적을 수 있을까? 보통의 사람이라면 사실에 대해 먼저 적을 것이다. 내가 이루어낸 업적이나, 내가 이 사회에 얼마나 필요한 인재인지 등을 먼저 내세우기에 급급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 자아를 가지고 있는 '나'라고 말할 수 있는지는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한다. 우리는 이미 수많은 과정을 통해 우리의 자아에게 원치 않은 성형을 강조해왔다.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거울을 들여다보라. 마주한 당신의 내면은 어떤 모습인가?


나의 내면은 정말 기괴하게 생겼다. 어떨 때는 생기가 넘치다가도, 또 어떨 때는 오물에 잔뜩 뒤덮인 가오나시처럼 끈적거린다. 수시로 내면의 모습이 바뀌어 보이는 이유는 아직 내가 나의 정확한 자아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현재는 내원을 통해 형태가 보이는 지경에는 이르렀다.


나는 내원을 한 이후로 같은 고민을 가지고 있는 지인들에게 정신건강의학과 내원을 추천한다. 의사가 너희를 잡아먹지 않아, 라는 시시한 농담도 잊지 않는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내원을 두려워한다. 우리가 정말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천천히 문드러져 사라져 버릴지도 모르는 '나'를 잃어버리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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