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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파도 Sep 15. 2022

흔들리며 살아남을 용기 ②

친애하는 내 감정의 파도에게|Ep.7

공백의 의미


나에게 하루의 시간이 주어졌다. 공식적으로 약속한 진료 예약일은 수요일과 금요일이었으므로, 사이에 목요일이라는 공백이 생겼. 나는  하루를 어떻게 보내는 것이 좋을지에 대해 생각했다.  마음을 가지고 그대로 병원에 내원한다면 결국 금요일의 나는 수요일의 나와 다르지 않을 것이었. 수요일의 나를 그대로 끌고 금요일까지 간다면, 나는 결국 금요일을 마지막으로 (일방적으로) 내원을  이상 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내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치료를 중단한다는 의미이고, 결국 이것은 ‘병원이라는 마지막 수단을 끝으로 내가 나를 포기하겠다는 선언이다. 그렇기 때문에 목요일은 나에게 중요하고도 꼭 필요한 공백이 된 셈이다.


나는 이 공백을 어떻게 채울지에 대해 고민했다. 생각을 오래 한다고 해서 정답이 나온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늘 실천이 어렵다. 수요일에 진료를 마치고 울며 집으로 돌아온 이후부터 목요일 오전 내내 학교에 있는 시간 동안, 나는 결정해야 했다. 수십 가지의 질문에 수백 가지의 대안이 생겼다. 하지만 나는 그 대안들이 나의 모든 것을 대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인정하고 나니 답은 간단히 두 갈래로 나뉘었다. 내가 느끼는 감정을 인정하고 내원을 진행할 것인지, 혹은 다시 나를 속이며 내원을 중단할 것인지.


나는 그대로 수첩을 열었다. 그리고 내가 느낀 감정들을 하나도 거르지 않고 모두 적었다. 어디서부터 신뢰가 뒤틀린 건지, 뒤틀린 이유는 무엇인지, 그때 느낀 감정들은 무엇인지. 종이 위로 떨어져 번지려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치며 차곡차곡 세 장을 썼다. 내가 지금까지 써왔던 편지 중, 가장 진솔한 편지였다. 나는 편지의 마지막 장에 이렇게 적었다.



이 쪽지를 드리러 예정에 없을 내원을 했다면 그건 정말 용기일 거예요.

이걸 읽고 계신다면 제가 그래도 다시 선생님을 믿고 가겠다고 다짐한 걸 거예요.

선생님을 믿으려고 노력해볼게요. 제가 저를 포기하지 않게 도와주세요.





마시멜로 이야기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내가 쓴 편지 세 장을 끊임없이 읽었다. 접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한 시간 반의 귀갓길이 가장 긴 날이었다. 편지를 펼치면 감정이 차올랐고 접으면 눈물이 흘렀다. 떨리는 손으로 세 장의 편지를 붙은 채 고속버스터미널에 도착한 나는, 가장 먼저 버스에서 내려 달려갔다. 정말 많은 버스들이 오고 가는 곳에서 집으로 가는 버스 두 대를 미련 없이 보냈다. 나는 처음 보는 숫자의 버스에 올랐다. 내가 알고 있던 길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돌아, 결국엔 병원으로 가는 버스였다.


어렸을 때 읽은 책 중 <마시멜로 이야기>라는 책이 있다. 하나의 마시멜로를 접시 위에 두고 5분을 기다리면 하나의 마시멜로를 더 준다는 실험이 있다. 5분을 기다리고 마시멜로 두 개를 먹을 것인지, 기다리지 않고 마시멜로 하나만을 먹을 것인지는 내 결정에 달렸다. 그리고 이 책은 '마시멜로'라는 유혹을 견뎌야만 더 큰 성공을 손에 쥘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처음 탄 버스가 터미널을 떠나는 것을 지켜보며 생각했다. 마시멜로 두 개를 얻는 것이, 당장 마시멜로를 먹을 수 있는 기쁨보다 정말 클까?


버스에서 내려 병원이 있는 건물로 들어섰다. 엘리베이터가 오기까지 기다릴 수 없어서 계단을 올랐다. 몇십 개의 계단을 뛰어 올라가려니 숨이 턱끝까지 찼다. 한 층을 올라가다 마스크를 벗고, 또 한 층을 올라가다 숨을 터뜨리고, 그렇게 한 층씩 올라가 결국 병원이 있는 층에 다다랐다. 나는 혹시 모를 비상약을 먹게 될 상황을 대비해 남겨두었던 물을 모두 입에 쏟아부었다. 마른입을 헹군 물을 뱉어내고 거울을 보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빈 플라스틱 물통에 미련을 담아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다. 병원에 들어가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거짓말의 굴레


간호사는 나에게 무슨 일로 방문을 했는지 물었다. 어제 내원했던 환자가 오늘 또 왔으니 이상하게 볼 법도 했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거짓말을 뱉었다. 약이 없어서요, 약 받으러 왔어요. 간호사의 눈꼬리가 휘어지는 게 보였다. 그래서 다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센터에서 받은 심리 검사 결과도 가져왔어요, 그거 전해드리려고요. 간호사는 알겠다며 대기자 명단에 내 이름을 올렸다. 나는 마지막 대기자가 되어 내 이름이 불릴 일을 기다렸다.


환자가 한 번 휩쓸고 간 건지 병원에는 사람이 없었다. 내 앞에서 먼저 진료를 보고 있는 사람 말고는 내 뒤로 대기자가 없었다. 마음이 급했다. 자리에 앉아서 대기해달라는 간호사의 말에도, 나는 괜히 진열된 책들을 하나 씩 꺼내 펼쳤다. 들어오지도 않는 글씨를 입에서 웅얼웅얼 씹었다.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진료실의 문이 열렸다.


"파도 씨, 들어오세요."


선생님은 여전히 똑같은 모습으로 그곳에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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