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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파도 Sep 26. 2022

흔들리며 살아남을 용기 ③

친애하는 내 감정의 파도에게|Ep.8

내뱉을 용기


진료실 안에는 선생님과 나, 둘 뿐이었다. 선생님은 똑같은 표정으로 내 앞에 앉아계셨다. 달라진 것은 나뿐이었다. 어제와는 사뭇 달라진 모습이 눈에 띄었던 모양인지 선생님은 웃으면서 운을 띄우셨다.


"오늘은 무슨 일로 왔을까요?"


나는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고민했다. 준비해 온 말은 많았지만 그것을 막상 입 밖으로 꺼내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내가 준비해 온 말을 꺼내면 선생님은 답을 주실 것이다. 그리고 그 답에 따라서 나는 앞으로 계속 내원을 할 것인지, 혹은 여기에서 나 스스로를 포기하고 치료를 중단할 것인지를 결정하게 될 것이다. 나는 두려웠다. 선생님으로부터 돌아올 말이 내가 원하는 답이 아닐까 봐. 그래서 결국엔 선생님과 내가 다시는 만나지 못하게 될까 봐. 결국엔 내가 나 스스로를 포기하게 될까 봐. 내가 나를 포기하는 것은 내가 그토록 바라는 일이라고 말하곤 했지만, 결국 내가 가장 원하지 않는 일이기도 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쪽지에 써온 내용들을 입으로 꺼내보기로 결심했다. 나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다가 어렵게 질문을 꺼냈다. 부모님을 뵙고 싶어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6개월 간 나는 치료를 통해 조금이라도 나아졌는지, 결국 이 터널에 끝은 있는지. 선생님은 내 질문들을 천천히 들으셨고, 고개를 끄덕이셨고, 결국엔 하나씩 답을 내어주셨다.


궁금한 것은 많았지만 모두 물어볼 수는 없었다. 내원에는 시간이 정해져 있었고, 나는 아직 그 20분이라는 시간 안에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선생님의 답을 들으며 나는 여전히 선생님을 믿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말을 꺼낼지 말지 망설이던 차에, 선생님은 나에게 말씀하셨다.


"파도 씨, 지금 파도 씨가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말로 바로 하기 어렵다는 걸 알고 있어요. 말로 하기 어렵다면 글로 적어와도 괜찮습니다."


그 한 마디에 내 마음의 벽은 허물어졌다. 결국 나는 꼬깃꼬깃 적어왔던 세 장의 쪽지를 내밀었다. 선생님은 웃으며 쪽지를 받아주셨고, 내일 부모님과 함께 얼굴을 보자는 인사를 끝으로 진료실의 문은 닫혔다.




마음이 닿는 법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한 번도 가지 않았던 카페에 방문했다. 예전부터 가보고 싶었던 카페였는데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가지 못했던 곳이었다. 나는 오랜만에 생긴 여유를 만끽하기 위해 병원에서 카페로 바로 향했다. 카페는 꽤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계단을 하나씩 오를 때마다 몸에 묶여있던 미련이 하나씩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가장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기분은 말로 형용할 수 없었다. 마치 진료를 마치고 나오던 나의 기분과 같았다.


나는 커피 한 잔과 케이크 하나를 주문하고 자리에 앉았다. 아이패드를 켜고 그 자리에서 바로 글을 적으려고 했다. 내가 지금 느꼈던 감정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록하고 싶었다. 내가 다시 병원에 간 마음이라던가, 결국 그 병원에서 얻게 된 위로라던가. 하지만 글로 적기엔 여전히 마음이 복잡했다. 아직 일은 풀리지 않았고 부모님과 선생님이 만나게 되면 그 이후엔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지 모를 일이었다. 지금은 마음이 단단하더라도 내일은 다시 허물어질 수 있는 법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카페에서 단 한 글자도 적지 못했다. 달달한 케이크는 모두 비웠지만, 쓰디쓴 아메리카노는 결국 모두 마시지 못하고 남겨버렸다. 카페를 나오니 해가 저물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시각이었다. 마음을 정리하고 싶었는데,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집으로 돌아온 뒤, 나는 개인 수업을 위해 근처 카페로 향하는 길이었다. 요즘 사람들과 연락을 하고 지내는 것이 힘들어서 핸드폰을 잘 보지 않았는데, 그날따라 울린 알람을 꼭 확인해야만 할 것 같았다. 나는 과외 수업이 시작하기 15분 전, 핸드폰의 화면을 켰다. 메일 하나가 도착해있었다. 발신자는 익숙한 이름이었다. 선생님이셨다. 손이 떨렸다. 나는 메일을 열 용기가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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