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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창 May 10. 2023

방과 후 티 타임 #2

홍차와 녹차의 행방불명



 일에 치여서 커피를 쫓느라 차가 점점 멀어져만 갑니다.

“차 한 잔 하고 가.”
같은 인사말은 없어진 지 오래,

“커피 한 잔 할래?”
“아아? 뜨아?”

저 역시 커피를 꽤나 사랑하는 인간입니다. 집에 있는 작은 에스프레소 기계로 진한 커피를 추출하고, 예열이 잘 된 작고 두꺼운 잔에 쪼르르 따라서 설탕 한 스푼 넣고 휘휘 저어서 마시면, 기운도 솟고 오감이 깨어나는 기분이 들지요. 일종의 커피 향 박*스 랄까요. 그래서 일까요? 커피를 마시는 동안은 딱히 쉬는 기분이 들지는 않습니다. 아메리카노나 라떼를 마시면 조금 쉬는 기분이 들까요?
차 라면 이야기가 조금 다릅니다. 일 하는 짬짬이 탕비실과 카페에서 마시는 커피와는 다른 그 무언가가 말이지요.  그러고 보니 탕비실에도 차가 있습니다. 제 기준에 확실히 차에 가까운 것은 거의 없을지도 모르겠지만요.

먼저 둥굴레차와 현미녹차가 보입니다. 가끔 루이보스차나 히비스커스차도 보입니다만, 차라고 부를 만 한 녀석은 사실 현미녹차가 전부입니다. 유자차도 율무차도 사실은 차를 떼어버려야 할 녀석들입니다. 차나무 잎으로 만든 차가 아닌 것들은 엄밀하게 말해서 차가 아니지요. 결명자커피, 보리커피, 한라봉커피… 그럴 수가 없듯. 우리가 흔히 차라는 단어를 붙이는 음료들 중에서 실제로 찻잎이 들어가지 않는 것들은 ‘대용차’로 분류됩니다. 물론 그 나름으로 훌륭한 음료지만, 차는 아니랍니다. 현미녹차는 그래도 녹차가 들어갔군요. 그냥 녹차라면 더 좋겠지만, 요즘에는 동네 편의점에 들러도 녹차티백을 찾기 어렵습니다. 탕비실에 있는 음료와 비품을 사 오는 오피스**나 **문구 같은 곳에서도 순수한 녹차나 홍차를 찾기는 역시나 어렵습니다. 저로서는 한 달 정도 해외출장길에 튜브고추장과 조미김 없이 나선 것과 같은 사태입니다.

21세기 초반만 하더라도 동네 슈퍼마켓 선반에서 녹차와 홍차를 찾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미역이나 다시마 봉지와 구별하기 힘든 엽차와 어두운 노란색 캔에 들어있는 재스민차도 종종 보였었는데, 어느새부터 점점 사라지더니 찻잎 100%로 만든 제품을 찾는 일이 어려운 지경이 되어버렸습니다. 커피가 대한민국 대표음료가 된 지난 20여 년 동안, 차를 즐긴다는 것은 상당히 마이너 한 일이 되어버린 것이 실입니다.

“카페인이 안 받나 봐요? 디 카페인 커피 있는데 드릴까요?”
함께 모인 자리에서 혼자 차를 마시고 있다 보면 흔히 듣게 되는 말입니다.

저기요, 죄송하지만 디 카페인 커피를 마실 바에는 그냥 커피를 마시겠습니다.


“모닝커피 한 잔 찐하게 마시고 힘내서 일하자고!”
오전 업무를 시작하기 전 팀장님의 단골 멘트입니다.
팀장님, 안타깝게도? 차를 마셔도 힘은 솟습니다.

차를 마시는 소수자(?)의 고충을 해결하는 수단이 영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다행히 인터넷과 물류 강국에 살고 있는 덕분에 쉽게 차를 구할 수 있습니다. 물론 하루 이틀 기다려야 하지만요. 갑자기 차가 똑 떨어지면 어떻게 하냐고요? 난감합니다. 앞서 말한 대로 차를 구하기가 쉽지 않게 되어버린 지금이니까요.

올해(2023년) 설날 즈음에 일입니다. 명절연휴 첫날 홍차가 똑 떨어졌지 뭐예요. 수년 동안 아침은 과일과 토스트 홍차로 만든 밀크티가 고정인 우리 집에서는 무척 난감한 일이었습니다. 물론 명절이라 다른 먹을 것이 있었지만, 마침 수제잼과 고급 제과점에서 사 온 통밀빵이 있었기에 밀크티 한잔이 간절했습니다. 명절연휴 막히는 간선도로를 달려(기어)서 기어이 차를 찾는 여행을 떠났습니다.
제가 즐겨마시는 홍차는 누구나 알고 있는 노란색 박스에 붉은색 딱지가 붙어있는 녀석입니다. 뭐랄까 홍차 하면 역시 그 녀석 이랄까요? 다른 홍차도 몇 번 마셔봤는데, 아침식사 밀크티 용으로는 그 녀석이 가격도 맛도 딱이라 몇 년째 애용하고 있습니다. 대학시절 학교 앞 시장골목 연쇄점에서도, 교문 앞 슈퍼마켓에서도 손쉽게 구할 수 있던 노란 박스 홍차는 수 킬로미터를 달려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양평군과 여주, 광주시가 맞물려 있는 경계에 있는 편의점과 슈퍼마켓 예닐곱 군데를 들렀는데도 도저히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귀성차량 틈에 낀 저는 망연자실 속절없는 기분을 느끼다가 갑자기 뜬금없는 오기가 발동해서, 급기야 “홍차를 못 구하면 돌아가지 않겠어!”라는 다짐을 해버렸습니다. 뭐든 한 번 하면 하는 성격이랄까요? 유독 먹는 것에 관해서는 그렇습니다.  
보통 때라면 이십 분 정도 걸리는 거리를 한 시간 반 이상 걸려 곤지암 까지 나갔습니다. 양평으로 되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린 탓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운명이 저를 곤지암으로 이끌었달까요? 정말 그랬습니다. 곤지암에서 기적적으로 노란 박스 홍차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중앙아시아와 러시아 식자재를 파는 가게에서 보드카 진열장 위에 있는 노란색 양철캔의 빛나는 자태를 본 저는 홀린 듯이 가게로 들어섰습니다. 정신이 들었을 무렵에는 이미 홍차와 함께 바이칼 호수의 투명함을 닮은 보드카 몇 병이 손에 들려 있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데는 두 시간 정도 걸렸습니다.

“아니, 차를 못 마시면 어떻게 되기라도 한단 말입니까?”
라고 말씀하셔도 어쩔 수 없습니다. 내일 당장 아메리카노를 못 마신다고 생각해 보세요. 이해가 되나요? 왕복 세 시간 쯤이야...

약장에는 정*환 선반에는 립*티

저도 커피를 스릉합니다.

I ♡ coffee

그림은 인별그램

https://instagram.com/jangchang_offic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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