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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낙하 Apr 15. 2023

8월의 크리스마스

글 스터디 '항해' 2023년 3회차 '거짓말'

'거짓말'이라는 주제로 글을 쓰는 활동을 하였습니다.

공미포 2,203자




나를 두고 가지 말라거나, 나보다 먼저 사라지지 말라거나 하는 말 따위는 그 누구도 꺼내지 않았다. 지킬 수 없는 약속이라는 것은 모두 알고 있었다.


지킬 수 없는 약속은 너무나 많아서, 나는 네게 그 어떤 거짓말도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거짓말이다. 이건 네가 아닌, 나를 위한 거짓말이다. 나는 너를 잃고 싶지 않다. 잃고 싶은 사람이야 어디에 있겠느냐만, 나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제멋대로인 사람이라 다른 사람들 따위 어찌 되든 좋았다. 오직 너만이, 너만이 내 곁에 남아주기를 소망했다.


너 없이 살아갈 세상 같은 건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다. 세상이 흔들리고, 피할 수 없는 종말, 더 이상 그 어떤 방법으로도 살아나갈 수 없을 것 같은 마지막 앞에서도 나는 네가 나보다 먼저 죽지 않기를 바랐다.


종말을 맞은 세계, 어느 날 갑자기 여름이 추워지더니 모든 것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너와 내가 여름휴가를 즐기던 어느 여름의 8월 6일, 호텔에서 나와 맞이한 아침은 어떻게 보아도 11월의 여름이었다. 여름일 것이 분명할 풍경들, 해변을 따라 늘어선 파라솔들과 노점상 트럭들, 어제까지 사람들이 헤엄치던 바다, 샤워부스, 여기저기 흩어진 여름의 흔적들. 난데없이 찾아온 한파에 풍경만이 여름으로 남아 차갑게 식어갔다.


어쩔 수 없이 짐을 싸서 집으로 돌아온 것이 8월 7일 아침. 집으로 돌아온 순간부터 날씨는 점점 더 추워지기 시작했다. 처음 한 달은 겨울 코트를 다시 꺼내 입고, 목도리를 두르는 정도에 불과했다. 뉴스에선 연신 이상 기후라며, 이 상태가 언제까지 유지될 것인지를 떠들어댔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갑자기 추워진 여름을 두고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대고, 걱정이야 하면서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올 것으로 여겼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봄, 4월 중순쯤에도 한파주의보가 내려졌던 적이 있지 않았는가. 이번에도 분명 돌아올 것이었다.


날씨는 갈수록 추워졌다. 9월이 될 때 즈음에는 완연한 한겨울 날씨가 되어 너는 출근할 때에 패딩을 꺼내 입고, 목도리에 장갑까지 꼼꼼히 둘러야만 했다. 너는 추위를 많이 탔기에, 나는 아침마다 따뜻한 차를 담은 병을 네 손에 쥐어주고는 했다. 내가 너에게 줄 수 있는 사랑이었다.


날씨는 점점 더 추워져, 10월이 지나고, 정말로 겨울이 될 쯔음에는 견딜 수 없을 만큼 추워졌다. 난방을 할 돈이 없어서, 보일러가 동파되어서, 동사한 사람들에 대한 뉴스가 조금씩 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회사는 재택근무로 전환되었다. 각종 공사는 대부분 중지되었다. 도저히 바깥에서 오랜 시간 작업할 수 없을 만큼의 추위였다. 집에서 일하는 프리랜서인 나도 추위를 조금씩 실감했다. 집에 있어도, 보일러를 틀어도, 집이 완전히 따뜻해지지 않았다.


해가 바뀌고 이듬해 4월 즈음엔, 모든 것이 멈추었다. 진작에 중단된 야외 작업들에 이어, 배달, 우편업무가 완전히 중단되었다. 도시는 더 이상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시간에 맞춰어 송출되는 라디오 방송만이 유일하게 이전과 같았다.


그리고 다시 한 해가 더 흐른 8월, 처음 날씨가 추워진 때로부터 2년이 지난 현재, 남아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라디오에서는 서서히 절망적인 소식이 들려왔다. 이 상황을 개선하여, 사태 이전으로 돌리기는 어렵다, 현 상황을 유지하며 살아갈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는 등, 각종 분야의 전문가라고 하는 사람들의 의견들. 사람들은 서서히 희망을 잃어갔다. 나라고 다르지 않았다.


희망을 잃은 세계엔 무엇이 남아있는가. 그러나 아직은 희망을 가진 사람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그들이 바보 같다고 생각했다. 이런 세상에 남아, 이런 상태를 유지하며 살아가면 뭐가 달라지는가. 내가 사랑한 풍경들은, 내가 사랑한 날들은 더 이상 돌아오지 않는다.


희망을 가진 사람들은 세계의 반대편에선 8월이 겨울이었다며, 그러니 분명 우리도 이 세계에 적응할 수 있다며 보기 좋은 미사여구를 떠들어댔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가당치도 않은 이야기였다. 생각해 보라, 우리가 여름휴가를 즐길 때, 그들이 겨울이었다 한들 그들 역시 겨울이 되어버린 12월을 맞이했다. 여름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다 무슨 소용인가.


세계의 반대편이 8월의 겨울을 보냈다 한들,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8월은 여전히 8월이었고, 겨울은 여전히 겨울이었다. 나는 문득, 우리가 겨울에 무엇을 하고 보냈었는지를 생각했다. 시간 내어 스키장에 찾던 날들을 떠올린다. 너는 크리스마스를 좋아했다. 우리는 매 해 크리스마스마다 트리를 꾸미고, 시간을 내어 여행을 떠나고는 했다. 그러나, 8월의 겨울을 보낸다 한들, 크리스마스는 찾아오지 않는다. 그러니  모두 거짓말이다.


어차피 종말을 맞을 세상이라면 하루라도 빨리 찾아와 너와 내가 한날한시에 죽는다면 차라리 나을 텐데. 그러니 먼저 두고 가지 말라느니, 꼭 함께 살아서 이 세상에 찾아온 위기가 해결될 날을 맞이하자느니, 부질없는 약속은 하지 않기로 했다.


부질없는 약속도 결국엔 희망이 남아있어야 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이 세계에는 희망이 있는가? 나는 없다고 보았다. 아니, 이제는 없어야만 했다. 언제 찾아올지 모를 희망이라면 차라리 없어야만 했다. 기약 없는 희망에 기대를 걸고 기다리기엔 나는 너무 지쳤다. 기약 없는 상황은 이제는 정말로 지긋지긋했다. 지긋지긋해서 넌덜머리가 날 지경이었다.


나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이기적인 사람이다. 이전으로 돌아갈  없다면, 이런 종말 속에 영원히 살아가야만 한다면, 차라리 너와 한날한시에 죽어버리는  나았다. 하지만 너는 무척이나 착해서, 이런 말을 한다면 분명히 슬퍼할 테니. 슬퍼하고,  그런 말을 하냐며 화를  테니. 그러니  사람아, 나는 네게 거짓말을  수밖에 없다. 희망을 속삭일  없다면,  무엇도 아닌 말을 속삭이면 된다. 나는 오늘도  귀에 언제라도 너와 함께하고 싶다는 거짓을 속삭인다. 나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거짓말쟁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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