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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파스의 비유

어지럽게 색깔이 섞여 꽂힌, 심지어 빠진 색깔의 흔적들이 적나라하게 남아있는, 크레파스 통을 본 적 있니?


이젠 오래된 일이야. 그 살벌한 광경을 처음 본 어린 시절이나, 크레파스의 비유를 토론했던 그녀와의 추억이나. 사실, 이 두 가지는 정확하게 연결되진 않아. 언제나처럼, 하나씩 살펴보다가, 사실은 그 둘이 닮아있다는 걸 알게 되는 거지.


요즘 아이들에게 크레파스가 어떤 물건인지 모르겠지만, 내게 그 학용품은, 영 마음에 안 내켰던 거 같아. 언제나 사물함에 있어야 하는 미술 도구지만, 애초에 난 미술에 젬병이었거든. 누구든 자신 없는 영역에서 심판받는다는 건 껄끄러운 일일 거야. 자주 그런 심판으로 판단하게 되는 법이니까. 교육도 마찬가지고.


오히려 내 주목을 받은 건, 그들이 당하는 부당한(?) 대우였어. 내가 물건에도 동정심을 느낀 최초의 순간이지. 사물함 속에, 그 무지개색의 수라장이 숨어있는 거야. 여러 곡절로 섞이고 꺾이고 깎기며 사라져 간, 크레파스의 지옥이.


물론 전혀 나쁜 일이 아니야. 크레파스와 아이들은, 자신의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하는 거니까. 다만 내가 유별난 녀석이라, 그 광경 속에서, 뭔지 모를 불합리함을 느껴버린 거야. 그땐 친구들과 어른들이 나쁘다는 결론을 내렸지만. ^^


조금만 더 귀여운 얘기를 하자면, 덕분에 난 ‘그림 실력 최악의 구두쇠’가 되었어. 못난 그림밖에 못 그리지만, 크레파스에 감사하는 이상한 역할이었지. 가장 못나게 그리는 놈이, 크레파스 통 정리에 열을 올리고 있었으니까. 한 번에 크레파스 하나만 꺼내서 사용하고, 빌려주면 끈질기게 받아내려 하고, 함부로 쓰지 말라는 당부에, 부러지면 크레파스가 불쌍하지도 않냐는 볼멘소리까지…….


실제로 그렇지만, 아마 친구들은 내가 쩨쩨하다고 생각했을 거야. 지금의 내가 보기에도 그렇고 말이야. 쩨쩨한 성격은 영원히 고치지 못할 테지만, 그래도 사람은 머리가 굵어지고, 변하는 법이니까.


아무튼 난, 그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어. 그게 내가 처음으로 사용한, 크레파스의 비유야. 물건에 대한 우리의 잔혹한 폭력은 나중에 얘기하더라도, 크레파스는 분명, 하나의 존재니까. 물론 정확하게 존재에 대한 개념을 가진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스스로 중요한 룰을 지키고 있었어. 분명 그게 세상의 중요한 원리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던 무언가 말이야.


말은 장황해도, 그건 단순한 거였지. 내가 당하기 싫은 건, 누구도 당하기 싫은 거야. 내가 혼나기 싫은 거처럼 친구도 혼나기 싫은 거라면, 누구라도 그런 대우는 받기 싫어할 거라고. 고로, 난 ‘내가 당하기 싫은 짓을, 누구에게도 하지 않을 거야.’라는 겁도 없는 각오를 하고 있었지.


이상하게도, 난 그 범위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어. ‘누구나’는 누구까지를 말하는 걸까? 공자님의 말씀 덕에, 난 더 어릴 때 개미를 동정할 수 있었어. ‘누구나’는 생명이라고 생각한 거지.


크레파스의 그 수라장(?)을 보고, 난 그 ‘누구나’에 ‘모든 것’을 처음 수식할 수 있었어. 흔히, 사람들이 의인화라고 부르는 비유야. 우리와 크레파스는 사실, 동등한 존재라는 거지. 물론 어쩔 수 없이 ‘우리’라는 단위를 사용해야 하고, 그들을 도구로써 이용해야 하지만, 적어도 아무 생각 없이 물건을 사용하지 않길 바라는 거야.


여기서 두 번째 비유를 사용할 수 있지. 크레파스가 우리와 동등하다는 건, 서로 닮은 구석이 있다는 거야. 수라장인 크레파스 통은 곧, 우리의 모습인 거지. 우선, 모두 각자의 색이 있다는 점이 있겠지. 누구도 다른 사람과 똑같지 않아. 각자의 특별한 개성이 있는 거야.


개중엔 자주 쓰이는 색이 있겠지. 사람의 무리에도, 메이저라 부를 수 있는 종류의 사람들이 있으니까. 누군가는 순식간에 그 색을 잃어버릴지도 몰라. 누군가는 너무 특이해서, 아무런 부름을 받지 못할 거고. 누군가는 억울할 정도로 쓸데없는 치레에, 몸이 깎여나가는지도 몰라.


물론 허술한 점이 많은 비유지만, 이 비유가 내게 특별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어릴 때 슬퍼진 건 제쳐둘 수 있어도, 첫사랑의 기억이 지워지진 않으니까. 나와 그녀는 비슷한 정도로 특이했던 거 같아. 이 비유를 조금씩 완성하는 과정이 정말 행복했거든…….


이렇게 길게 말할 거리도 아니었지만, 내게 크레파스의 비유는 중요한 애증이라는 거야. 그냥 그런 헛소리였고, 다음엔 그녀와의 크레파스를 적어볼까, 계획해 보는 파트인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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