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이다. 두 달에 한 번, 시험 치르는 기분으로 나의 슈퍼맨을 만나는 날.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나의 차림새로 1차 평가, 표정으로 2차 평가 그리고 착석 후 대화로 최종 평가가 이루어진다. 사실, 원장님은 이제 목소리만 듣고서도 모든 걸 꿰뚫는다. 나의 슈퍼맨, 담당 주치의가 된 지 10년. 눈물, 콧물 범벅으로 살려달라 소리치거나 때론 병실 침대에 앉아 멍때리는 모습, 책을 출간하고 신이 나 환하게 웃으며 책을 건넸던 모습까지. 별별 모습의 고간호사를 마주했기에 가족보다 나를 더 잘 알고 있다.
환자의 권리와 의무 중 '환자는 자신의 건강 관련 정보를 의료인에게 정확히 알리고, 의료인의 치료 계획을 신뢰하고 존중하여야 한다.'라는 환자의 의무 사항이 있다. 진료실 안에선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가감 없이 얘기해야 하고, 일상생활에서는 의료진과의 신뢰를 바탕으로 치료에 힘써야 한다. 예를 들어 처방한 약물을 꾸준히 복용하는 것, 먹지 말아야 할 음식을 잘 참는 것, 과로하지 말고 잠을 잘 잔다거나 안정적인 주위 환경을 만드는 것 등을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환자의 의무를 다하고 아무리 발버둥 쳐봐도 뜬금없는 폐렴이나 대상포진과 같은 질환들이 나를 괴롭힐 때가 있다. 얼마 전 바이러스의 감염으로 눈의 흰자위가 찢어졌고, 한 달 동안 치료 끝에 다행히 흰자위를 꿰매지 않고 붙였다. 눈으로 고통이 분산되어 그랬는지 복통은 그나마 조금 줄어들었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나 할까.
지난 16년간 아침, 점심, 저녁 약을 챙겨 먹었는데 갑자기 원장님은 큰 결심을 한 듯 미소를 지으며 나를 봤다. 조용하게 낮은 목소리로 "약을 줄여봐도 되겠어요. 점심 약을 빼서 먹어보죠. 하나라도 좋아지는 게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점심 약이 없어지니 좀 수월하겠죠? 한 알 줄여봅시다." 순간, 꿈인지 생시인지. 영화 킹스맨에 나오는 악당들의 머리가 폭죽처럼 팡팡 터지는 장면과 함께 에드워드 엘가의 <위풍당당 행진곡>이 병원 스피커에서, 양쪽 귀에서 들리는 듯했다. 승리이자 축제였다. 원장님과 내가 한 팀으로 크론씨를 물리친 것 같았다(크론씨는 아직 살아있지만). 믿기지 않아 되물었다. "점심 약 안 먹어도 돼요? 진짜 안 먹어도 돼요? 이제 아침, 저녁으로 약 먹어도 돼요?" 같은 질문을 몇 번이나 하는가. 답답한 간호사야. 또 한 번의 오케이 사인을 받고 나서야 의자에서 일어났다. 원장님은 진료실을 나가는 나에게 "두 달 뒤에 뵐게요. 그동안 잘 지내세요."라며 환자에게 보내는 굳건한 믿음의 표정을 지어주었다.
심장 소리가 귓가에서 들렸다. 얼굴이 새빨개졌다. 약국의 약사가 "한 알 줄었네요."라며 기쁨을 함께해 주었다. 지난 16년의 세월을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잡곡밥과 김치, 과일, 탄산음료, 케이크, 피자, 빵, 아이스크림 등등. 많은 것을 피해 온 지난 시간에 대한 보상. 조금 더 주의해야겠지만 이 정도 아픔에 감사한다. 다음 진료실을 찾아갈 때까지 환자의 모습으로 최선을 다해 이번에는 나의 슈퍼맨에게 기쁨을 드리고자 한다. 고마워요. 나의 슈퍼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