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영화 리뷰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리뷰

크지 않은데도 커 보이는 게 남의 떡이지

by 당첨자

※스포일러 포함


제목 너무 어려운 거 아닌가요

부국제 이후로 에에올 이야기가 많이 보였다. 제목 정말 너무 길었고, 한국어 번역하지 않은 저 줏대가 감탄 나올 정도라 인상적이었다. 영화를 보기 전까지 제목을 제대로 기억한 적 없었다. 내가 굳이... 따로 외울 필요는 없으니까. 부국제 티켓팅 때부터 언급됐던 <양자경의 멀티버스>가 부르기 편했고, 근데 정식 명칭이 에...에...올...로 굳어진 뒤에는 다들 '에에올'로 적당히 부르는 듯했다. 그리고 두 감독의 코멘터리와 NG컷을 포함한 확장판은 <양자경의 더 모든 날 모든 순간>으로 번역되어 재개봉되었다. 사실 나는 확장판을 감상했는데, 영화를 보고 나니 그 배려 없는 제목이 좀 더 영화다운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관객 모객 측면에서 고려할 때 확장판 이름이 훨씬 낫다. 사람이 티켓팅하고 나서도 영화 제목을 기억하지 못하는 건 문제가 크잖아. <아무개의 ~~> 이런 양식으로 과거 홍콩영화의 향수를 건드는 제목이라 로컬라이제이션 제대로 되기도 했다.


두 달가량 극장에서 상영 중

영화제를 매년 방문하는 시네필이 극찬하는 영화라면, (죄송하지만) 한 달 정도 극장에서 진행하다가 VOD로 금방 풀릴 줄 알았다. 그래서 나는 극장 관람 시기를 놓쳤다 생각하고 VOD 오픈만 기다렸다. 근데 한 달이 지나고, 한 달 반이 지났는데, VOD는 안 풀리고 계속 극장 상영을 하는 것 같은 거다. 접근성 좋은 극장에서 좋은 시간대 표는 없을 것 같은데 어떡하지 싶었다. 근데 뒤늦게 찾아보니 확장판을 재개봉한 거였다. 물 들어왔을 때 노 젓는 배급사의 열정에 감사드리며. 더 늦기 전에 티켓을 예매했다. 평일 낮이었는데도 좌석의 1/3 정도가 차는 걸 보고 놀랐다. 웬만한 상업 영화도 이러진 않을 것이다. 이건 진짜 사랑이고, 입소문이다. 그 정도야? 대체 얼마나 재밌길래? 얼마 전 팟캐스트 시네마운틴 6회에서 장항준 감독님이 극찬한 것을 듣고 더 궁금했다. 이렇게 입소문을 탄 영화를 보러 가면 솔직히 무섭기까지 하다. 다들 재밌다는데, 나한텐 재미없으면 어떡하지. 내 입맛이 마이너면 어쩔 거냐고.


광둥어, 보통화, 영어 사이의 버스 점프

에블린(양자경 분)의 첫 대사를 들었을 때, 예상했던 광둥어가 아닌 보통화라서 의아했다. 양자경이 나왔으니 영어 아니면 광둥어만 기대한 것이다. 내 선입견이 또... 내 색안경이 또... 이게 홍콩 영화도 아닌데. 왜 옛날 영화들만 생각만 하고 반가웠을까... 그런데 양자경을 모셔왔는데, 집에서 가족끼리 편하게 대화할 땐 광둥어를.. 쓸 것 같지 않아?? 내가 이상해?? 하면서 지켜보는데 이것도 섬세하게 심어놓은 설정 같았다.

에블린과 웨이먼드(키 호이 콴 분)는 단둘이 있을 때 보통화와 영어를 어지럽게 섞어 쓴다. 이민 1세대의 혼란과 고충이 입을 열 때마다 느껴졌다. 웨이먼드는 젊은 시절부터 광둥어는 쓰지 않고 보통화만 구사했다. 나는 이 지점에서부터 할아버지가 웨이먼드를 반대한 이유가 은은하게 느껴졌다. 보통화로 함께 떠나자고 꼬시는 젊은 웨이먼드와, 광둥어로 그 결혼을 반대하는 장인어른이라니. 홍콩의 빨간 택시에 탑승한 양자경의 플래시백이 인상적이었다. 에블린은 아버지와 대화할 때 모국어인 광둥어를 당연히 편하게 사용한다.

에블린의 아버지는 절대 광둥어만 쓰신다. 영어 못 쓰는 건 알겠는데, 사위 앞에서 보통화 한번 꺼내지 않는 그 모습이 고집스러웠다. 그 세월 동안 배울 생각조차 없었던 것이다. 아니면 할 줄 알면서도 사위와 거리감을 좁히기 싫은 것이거나. 조이(스테파니 수 분)는 영어를 주로 쓰지만, 가족 앞에선 보통화를 가끔 섞어 쓴다. 광둥어는 거의 구사하지 못한다. 그래서 할아버지와 말이 거의 통하지 않는다. 할아버지는 조이의 중국어가 날이 갈수록 엉망이 된다고 꾸짖기까지 한다. 그야 두 분은 각자 다른 언어라고 할 만큼 격차 있는 중국어를 구사하고 계셨으니까요...

할아버지와 에블린, 조이 사이에는 세월의 벽만 있는 게 아니라 언어의 벽까지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언어를 전부 이해 가능한 통역사는 에블린뿐이었다. 영화의 주인공. 가족의 중심. 가장 특별한 사람. 모두를 연결줄 수 있는 사람. 에블린이었다.


홍콩 영화에 표하는 감사

내가 홍콩 영화 세대인 건 아니지만, 또래에 비해 홍콩 영화를 많이 접한 편이다. 그래서 중간중간 웃음 터지는 액션 포인트가 많았다. 성룡과 닮은 듯 한 웨이먼드가 전대 가방을 풀어헤치고 쌍절곤처럼 휘두르는 모습이나, 또 다른 멀티버스에서 <화양연화>마냥 골목길에서 치사량의 가오와 색조를 때려 붓는 것이나, 쿵푸 명장 양자경을 소환한 것 등등. 나는 있지도 않은 향수를 강제로 느끼고 배까지 불렀다. (근데 웨이먼드 진짜 성룡 닮지 않았나요... 그렇지만 그의 얇은 목소리 들을 때마다 아 아니네. 아니지. 아닌데 왜 자꾸 닮은 것 같지. 하면서 인지 부조화 왔음)


만약 그때 그 선택을 하지 않았더라면

인간이라면 반드시 하는 후회다. 살아온 세월이 길면 길수록 그 지점이 많을 것이다. 에블린은 버스 점프를 체험하는 중 웨이먼드와 결혼하지 않고 성공한 또 다른 세계의 자신을 마주한다. '쿵푸 마스터가 되고, 화려한 드레스와 눈부신 플래 앞에 서 있는 반짝거리는 나.' 에블린은 본인의 선택이 잘못된 것이라 여기고 후회하기까지 한다. 그런데 화양연화 버스 속 웨이먼드는 소박하지만 가정을 꾸리고 자녀를 가진 또 다른 버스의 에블린과 웨이먼드를 부러워한다. 인간은 참 알량하지. 그때그때 주어진 여건대로 충분히 흘러왔으면서도 늘 다른 접시에 놓인 떡을 시기한다. 무수한 버스 사이에서도 더 좋고 더 나쁜 인생은 없다. 후회할 필요 없고 늘 이게 최선의 인생이라는 뜻으로 들려서 마음 편했다.


이해되지 않는 행동을 해야만 가능한 점프

이 영화가 유쾌한 요인 중 하나는 점프의 조건에 있다. 보통의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황당한 짓을 해야만 멀티 버스 간 점프가 가능한 것이다. 억지로 하려고 하면 절대로 되지 않는 종이에 손 4번 베이기, 트로피를 딜도로 사용하기, 아버지의 콧물을 입에 넣어주기 등. 이딴 게 설정을 유지하는 전제라고 하니 허무맹랑한 짓거리를 해도 어색할 게 없었다. 오히려 해괴하면 해괴할수록 절박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리고 나는 앞으로 살면서 갑자기 이상한 행동을 하는 사람을 보더라도 의연하게 넘기기로 했다. 또 다른 멀티버스에게 비상한 능력을 대여하려는 건가 보지. 남의 사정도 모르면서, 남의 멀티 버스도 잘 모르면서. 그 찰나를 함부로 민망하게 만들지 말자.


엄마의 영화에서 빌런은 딸내미

이 영화는 멀티버스에 탑승하고 있지만, 나는 그 판타지 요소를 걷어내고 에블린의 흘러가는 인생을 보았다. 버스 점프만 빼면 사실 살면서 한 번쯤 겪는 망측하고 평범한 순간들이다. 중요한 자리에서 집중하지 못하 파투 내고, 딸이 맘처럼 되지도 않고, 남편과의 결혼을 후회하고, 무리한 요구를 하는 아버지가 버거운 그런 나날들.

그리고 엄마들은 딸에게 유독 의탁하는 경향이 있을 것이다. 자기처럼 살지 않았으면 하면서도, 용납되지 않는 부분에 있어서는 맘에 없이 쌀쌀맞게 되고, 그렇다고 딸을 힘들게 만들려고 했던 건 아니었는데. 흑화 한 딸을 마주하면 기가 차면서도 오죽하면 그랬을까 싶어 가슴 아프고. 엄마의 인생에서 딸내미는 문득 빌런인 날이 있을 것이다. 딸에게도 엄마는 버겁고 흑화 하게 만든 요인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이 영화가 너무 이상한데도 평범한 이유이다. 모녀 이야기는 반칙이라서 나는 극장에서 쪽팔리게 오열했다. 특히 돌멩이한테 몰입한 게 너무 자존심 상했다.


아등바등 살 필요 없는 세상에서 다시 태어나면 될까?

'다시 태어나면 돌로 태어나고 싶다.' 내세에 관해 이런 대답 들어본 적 있을 것이다. 돌멩이로 태어나면 그 자리에 평생 멍 때리면서 살 수도 있고, 힘들게 돈 벌 필요도 없고, 자아가 없으니 심심한 것도 아픈 것도 모를 거니까. 그래서 에블린과 조이는 기꺼이 돌까지 돼 봤는데, 두 사람은 가만히만 있으면 되는 세상에서도 가만히 있질 못한다. 인간은 원래 그렇다. 굳이 몸을 움직여 보고 존나 못해서 기분만 우울해진다. 근데 그 본능을 멈출 수가 없다. 인간은 뭐라도 해야 한다. 잘하고 못하고가 중요한 게 아니다. 그냥 그게 살아있는 감각이다.

나는 두 감독이 긴 러닝타임을 거슬러 이렇게 어이없게 간단한 격려를 해주는 게 좋았다. 말로 들으면 짜증 났을 텐데 영화가 재밌어서 덕담 인정했다. 너는 뭐든 존나 못하니까 뭐든 할 수 있어!!


영화 제목: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2022)
감독: 다니엘 콴, 다니엘 쉐이너트
주연 배우: 양자경, 스테파니 수, 키 호이 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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