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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상준 Nov 07. 2022

불어 터진 라면의 눈물

어릴 때 나는 요즘 말로 게임중독자였다. 그때 말로는 오락실 죽돌이. 언제 처음 오락실을 갔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최초 오락실에서의 기억은 5살이었다. 외갓집에서 용돈을 받아 골목길을 내려오면 동네 슈퍼가 하나 있었고, 건너편에 큰 오락실이 하나 있었다. 용돈은 500원이나 1,000원을 받았는데, 500원을 받으면 치토스 작은 봉지 하나 사서 남은 200원으로 오락을 하러 갔고, 1,000원을 받으면 엄마 은행에 저금을 했다. (물론 그 돈은 내 생활비가 되었다.)      


오락실에 치토스를 들고 가면 우선 치토스를 뜯어서 안에 있는 복권을 긁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지독한 똥손으로 가장 크게 당첨된 것이 한 봉지 더였기 때문에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익숙하게 꽝 다음 기회에를 확인하고 과자를 빠른 속도로 흡입한 뒤 200원으로 오락을 하고 외갓집으로 돌아가면 이상하게 뿌듯했다. 하루를 알차게 보낸 느낌이 들었다.     


물론 외갓집에서만 오락실을 갔다면 게임중독자라고 소개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집에서도 오락실을 자주 갔는데, 보통 사람들은 돈이 생겨서 오락을 하러 갔다면 나는 그냥 구경을 하러 가기도 했다. 당시 용돈이 없기도 했고, 오락을 하겠다고 돈을 달라고 하면 집에서 정말 엄청나게 혼이 날 게 뻔하기 때문에 돈을 달라고 말도 못 했다. 그렇다고 거짓말로 돈을 얻을 만한 용기도 없었다. 그러면 오락실을 안 가면 되는데 또 가고 싶었던 마음이 컸던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어린 나이에 매일 오락실 출근 도장을 찍었다. 돈 없이 오락실을 가면 사실 딱히 할 건 없다. 그저 다른 사람이 오락하는 것을 신기하게 쳐다볼 뿐.     


그러던 어느 날 용돈을 받지 않고도 오락을 실컷 할 수 있는 방법이 생겼다. 바로 아버지 담배 심부름이었다. 당시 아버지가 피우시던 담배 한 갑의 가격이 700원이었다. 아버지는 담배를 사오라며 700원을 대체로 딱 맞춰주시던 분이었는데, 어느 날부터 1,000원짜리 지폐 한 장을 주실 때도 생겼다. 그럼 내 손에 300원의 잔돈이 쥐어졌고, 나는 그 돈을 가지고 오락실로 가서 세 판을 신나게 하고 왔다. 처음에는 아버지가 워낙 엄하셔서 혼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오락실을 즐기고 싶은 본능을 이길 수는 없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아버지가 잔돈 가져왔냐고 안 묻는 것이었다.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아버지가 잔돈을 찾지 않으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버지 나름 아들에게 주는 용돈으로 생각하셨을 수도 있고, 언젠가 이실직고하고 용서를 빌겠지 하는 생각을 가지고 계셨을 수 있겠지만 그때의 나는 그저 아버지 몰래 오락실을 즐길 수 있다는 즐거움만 가득했던 6살이었다.     


그러던 어느 일요일 점심. 아버지가 라면을 끓이시다가 담배가 그리우셨던 것 같다. 나에게 담배를 사오라고 1,000원을 주셨다. 그리고 라면 먹어야 하니까 바로 오라고까지 하셨던 것 같다. 그런데 나는 뒷말은 들리지 않았다. 내 머리가 거부했다. 이미 머리에는 오락실 가서 무슨 무슨 게임을 할 것인지를 고르고 있었다. 그렇게 동네 슈퍼에서 88 라이트 담배를 사고 오락실로 향했다. 마치 기계들이 나를 손짓하는 것 같았다. 정말 나는 당시 무엇에 홀린 듯 신나게 오락을 했다. 진짜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말이다. 그렇게 시간은 훌쩍 지나갔다. 사실 오락을 그렇게 못하지 않는 편이라서 100원으로 1시간 가까이하기도 한다. 그런 나에게 300원이 쥐어졌으니 오락실에서 보낸 시간이 엄청나게 흐른 것은 당연했다.     


시계는 3시를 가리키고 있었고, 나는 300원을 모두 썼다. 그러자 머리에 아버지가 마지막에 한 말이 떠올랐다. 라면이 어쩌고 저쩌고… 아차! 라면! 정말 미친 듯이 집으로 뛰어갔다. 살짝 눈물도 나왔다. 겁에 질려 있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아버지는 정말 엄격하고 엄하셨다. 한 번 혼을 내시면 육체와 정신의 끝까지 몰아붙이시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러니까 점심으로 라면을 끓이고 계시던 아버지의 심부름을 하기 위해 나온 것을 잊은 채 오락을 하다가 시간을 다 보낸 것이다. 정말 벼랑 끝에 선 기분이었다.     


집에 도착해서 안방에 들어가니 TV 소리만 나오고 집은 차분했다. 라면 냄새만 방 안에 가득했고, 아버지는 말씀이 없으셨다. 나머지 가족들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속으로 죽었다고 수없이 되뇌이면서 방구석에 조용히 서 있었다. 아버지는 말없이 인기척을 느끼셨느지 돌아보셨다. 그리고 냉정하고 차가운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표정도 이미 방에 있던 라면처럼 짜게 식은 표정이셨다.     


  “밥 무라.”     


그때 방에 있던 다 불어터진 라면이 보였다. 김치와 국수 면발, 그리고 콩나물이 들어간 라면이었다. 전형적인 6~70년대 양 불리기 스타일의 라면. 라면 면발은 우동 면발처럼 커져 있었고, 국수 면발은 불다 못해 툭툭 끊어져 있었다. 그리고 면에서 나온 전분이 국물을 걸쭉하게 만들고, 면이 국물을 흡수해서 흡사 볶음면 같이 되어 있었다. 한 마디로 맛없어 보였다. 그렇지만 우리 집 철칙. 음식을 버리면 벌을 받기 때문에 먹어야 했다. 내가 먹어야 할 양만큼 덜어져 있는 그릇 앞에 앉아 한 젓가락 들고 먹었다.     


너무 맛없었다. 38이 된 지금까지 먹어본 모든 라면을 통틀어서 가장 맛없었다. 그런데 먹었다. 꾸역꾸역 먹었다. 생각해 보면 아버지는 아마 머리끝까지 화가 나셨을 것이다. 흡연자가 담배를 피우고 싶을 때 못 피셨으니 얼마나 심리적으로 힘드셨겠는가? 사실 지금의 내 성격 같으면 아들이고 나발이고 불같이 화를 냈을 텐데 아버지는 차분한 감정을 최대한 유지하셨다. 무뚝뚝한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아들에 대한 최대한의 배려가 아니었을까?     


그런데 이 라면을 먹으면서 눈물이 났다. 물론 이런 아버지의 배려와 사랑을 느껴서 운 것은 아니었다. 이번 눈물은 나에 대한 실망감이었다. 나는 가장 가까운 사람인 아버지를 실망시킨 것이다. 아버지는 나를 믿고 심부름을 보냈고, 내 배를 채워주기 위해 라면을 끓이셨다. 그런데 나는 그런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렸다. 그런 나에게 화가 났고, 실망스러웠다. 그래서 울었다. 그것도 끅끅거리면서 말이다. 아마 이때 어린 나는 알았을지도 모른다. 부자지간에 살가운 대화는 하지 못할 거라는 걸 말이다. 나도 아버지도 서툰 아버지였고 아들이었다. 이때도 잘못했다는 한 마디를 했다면 더 좋은 관계가 되었을 텐데 나는 잘못했다는 마음과 실망시켰다는 마음, 나 자신에 대한 실망이 복합적이었던 것 같다. 잘못했다는 말을 끝내 하지 않았고, 아버지도 끝까지 다그치시지 않았다.     


다 불어 터진 라면을 보면 그래서 어린 시절 잘못했다는 말 한마디 못 건네고 자기 마음만 돌아봤던 내 자신에 대한 회한이 담긴 것 같아 답답해져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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