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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ap Oct 17. 2022

그런 너는 사랑할 수밖에

미래의 너에게

몇 년 전 사촌 동생이랑 후쿠오카에 갔을 때였다. 후쿠오카에 가면 꼭 가보고 싶은 곳이 있었는데 바로 '나카스 야타이'였다. 나카스 강을 따라 늘어진 포장마차 거리이다. 포차 거리는 한국에도 많지만 일본 포차 거리인 만큼 특유의 분위기가 있을 것 같았다. 술을 마시기 위해서라기보다 분위기를 느끼고 싶었다. 이른 봄에 갔었는데 포차 거리엔 벚꽃도 꽤 많이 피어있었다. 드문드문 사람이 있었는데 가장 앉기 편해 보이는 포차에 자리를 잡았다. 나마비루를 한잔 시켜놓고 야끼도리를 하나씩 주문했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일본말과 함께 생각했던 대로 나카스 야타이의 분위기는 꽤나 낭만적이었다. 야금야금 꼬치와 맥주를 마시며 느긋하게 분위기를 즐기고 있는데 우리의 왼쪽 편으로 앉아 있었던 중년부부와 눈이 마주쳤다. 남자분께서 능숙한 한국말로 "한국 분들 인가 봐요"라고 물으셨다. 한국말로 대화하는 걸 들으신 모양이었다. 놀라기도 하고 갑자기 들은 한국말이 반갑기도 해서 한국분이냐고 물었더니 아니라고 하셨다. 일 때문에 한국에 자주 간다고 하시면서 강남 쪽에 간다고 하셨다. 우리 보고 어디 사냐고 물으셔서 동생은 상암, 나는 당시 사당에 살고 있어서 사당이라고 말씀드렸더니 사당! 알아요! 하며 무척 반가워하신 게 기억난다.


그리곤 몇 마디 더 대화를 주고받았는데, 가장 잊히지 않는 이야기가 있었다. 중년부부는 아이들이 다 성인이 되고 나서는 이제 너희들이 알아서 살라며 엄마 아빠는 할 일을 다 했다고 선언하셨다 했다. 그 이후로 이렇게 저녁에 나와서 맛있는 것도 먹고 술 한잔도 하며 데이트를 하신다고. 순간 야타이 분위기에 취한 건지, 피곤한 상태에서의 맥주 몇 모금이 취기를 부른 건지 작은 포차 안으로 벚꽃이 흩날렸다. 내가 가장 바라는 연인의 모습을 우연히 바다 건너 일본에서 마주하고 있던 순간이었다.


지나간 연애 중에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생각해 본 적이 없어 잠시 뜸을 들이다가 문득 떠오른 날이 있었다. 하늘에 구멍이 난 듯 비가 퍼붓던 여름이었다. 동네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는데 비가 너무 많이 와서 골목을 걷다가 그냥 이름도 모르는 아무 가게에 들어갔다. 날씨 때문인지 어둑어둑한 가게에는 아무도 없었다. 식사를 하러 온 두 사람은 닭볶음탕을 시켰다. 그리고 술을 먹을 계획이 아니었지만 왠지 가볍게 반주를 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서 쓱 눈치를 보니 맞은편에 앉은 사람도 똑같은 눈치를 주고 있었다. 그래! 딱 한 병만 나눠먹자! 하고 맑고 경쾌하게 참이슬도 주세요! 를 외쳤다. 가게 안으로 비가 쏟아지듯 온통 빗소리만 가득한 곳에서 특별하지 않은 닭볶음탕과 시원한 소주 한잔이 왜 그렇게 맛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순식간에 비워진 소주 한 병이 아쉬웠고 맞은 편의 사람도 아쉬워하는 탄식이 들리자 둘 다 크게 웃어버렸다. 손뼉이 착착. 그래 소주는 각 일병이지!


지나간 연애는 지나간 연애로 묻어두는 편이기도 하고 추억이라 할 만한 일도 별로 없었는데 꽤 진한 추억을 남기고 간 사람과의 만남 이후에 누군가 지난 연애를 물으면 가장 좋았던 기억이고 어쩌면 가장 바랐던 연애의 모앙이었던 것 같다. 서로가 서로의 가장 친한 친구. 만나면 하고 싶은 말이 어찌나 많은지 졸음을 참아가면서 도란도란 나누는 이야기가, 눈을 감은 채 잠들기 직전까지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게, 특별한 일을 하지 않아도 그냥 좋은 사람.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그리고 그런 사람과 나의 삶을 함께 살아가길 바랐었다.


그렇게 그날은 나이가 들어 아이들이 성인이 되고 그 아이들이 아이를 갖고, 시간이 흘러 쭈글쭈글해진 두 손을 꼭 맞잡은 채 동네 산책을 함께 하는 노부부의 모습을 더욱 진하게 그려 본, 후쿠오카의 봄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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