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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세벽 Aug 07. 2023

사형 집행

불꽃같던 청춘이여

마침내.....  퇴원했습니다. ㅎ


기력이 돌이오기 시작한 건 사나흘 전이었습니다.

겨우 돌아온 정신을 붙잡고 휴대전화를 열었는데 오래전 끄적였던 저장글을 발행하는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그걸 알고는 무작정 삭제를 눌렀는데..... 댓글 다신분들이 계셨습니다.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그분들께 이 자리를 빌어 사과드립니다. ^^;


정신이 돌아온 그날부터 이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저의 병상일기?를 대신해서 올립니다. ㅎ


그동안 멈췼던 소설 연재도 곧 이어가겠습니다.


아래는 이 글의 모티브가 된 기사입니다.




단편소설입니다.


까만 어둠속 한가운데 서 있었다.


나는 베개 옆에 놓여 있던 휴대전화기를 집어들었다.


휴대전화기조차 들여다 볼 수 없을 정도로 무력한 상태로 병실 침상에 지낸지 보름도 더 지난 어느 날이었다.


열었다. 병실 침상에 누운 채로


휴대전화 속 모든 게 낯설었다. 아니 비현실적이었다.


상온 초전도체와 새만금의 잼버리, 범죄 예고와 수많은 사건 사고들이 가상현실처럼만 여겨졌다.


그러나 중국공안당국에서 한국인을 사형 집행했다는 기사를 보자 나는 꿈에서 깨어난 듯 현실감을 되찾았다.



불현듯 그와 나 그리고 향숙이가 함께 버티던 불꽃같던 날들이 어지럽게 떠올랐다.


주위의 의심 어린 시선과 우려에도 불구하고 당시 우리는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제각각 자신의 길을 가고 있었다.


어쨌든 겉으로 보기에 우리는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신문사에서 나는 광고기획사에서 그녀는 공직자로서.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당시 우리는 고문후유증을 온몸으로 겪고 있었고 그래서 사실상 만남을 회피했다. 그리고 각자도생 중이었던 건지 몰랐다.




내가 그를 다시 만난 건 새천년이 시작되기 몇 해 전이었다.


그와 나는 한남동의 한 식당에서 낮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는 끝내 울먹였고 나는 위악을 부렸다.


술에 취했던 탓인지 그날의 기억은 몽환적이다. 여름인지  늦은 봄 어느 날인지 그도 아니면 가을 초입이었던 건지....... 어쩌면 겨울이었을지도 몰랐다.


병신새끼, 약은 처먹고 다니냐. 뭐 그리 대단한 양심가라고 처 울고 지랄이냐. 니가 나발을 불었든 말든 이제 게임은 끝났어, 새끼야. 우리가 그렇게 외쳐대던 군부독재타도가 이루어졌다고 병신아. 그러니까 이제 그 좆같은 아가리 닥치고 그만 처 울어. 쪽팔려 죽겠다 새끼야.


나는 그의 징징거림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면서도 위악을 부리거나 대놓고 폄훼했다.


그가 정신과치료를 시작한 것도, 고문에 못 이겨 친구들의 이름을 불었다고 자책하며 눈물콧물을 자주 보인 것도 다니던 모 신문사에서 인정을 받으면서부터였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치료를 받고 약물을 복용해도 호전되기는커녕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악화되는 모양새였다.


안타깝게도 그날 그와 어떻게 헤어졌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분명한 것은 나는 그날 이후 꽤 오랫동안 그를 만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시 나는 그리움을 멀찍이 두고 지내다 보면 비열함과 그로 인한 열등감이 안갯속인 듯 흐려지는 효과가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때문에 그뿐만 아니라 향숙이조차 거의 만나지 않았다.


그가 새로 뽑은 체어맨을 타고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항생제를 놓으러 온 간호사가 나를 그 어지러운 기억에서 꺼내주었다.


간호사는 혈압을 재고 산소포화도를 측정했다. 그리고 염증수치를 알아보려고 팔뚝을 찔러 피를 뽑는 중이었다.



생각해 보니 나는 최근 몇 년 전까지도 중국 당국에 체포된 그의 소식을 접하고 있었다.


처음엔 내 애인이었다가 나중에 그와 더 가까워진 향숙과 마지막 통화를 한 지가 사오 년 전이었으니까...... 마 나는 그때 당시 그가 사형선고를 받고 항소 중이라는 소식을 들었던 것 같다.


충격적인 소식이었지만 설마 사형집행까지는 이루어지지 않을 거라 믿었던 게 사실이다. 나는 언젠가 그가 한국으로 송환되어 다시 재판을 받고 그리고 길어야 이삼 년 복역 후 출소할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때문에...... 향숙의 전화마저 지워버렸던 기억이 났다.

그가 한국으로 돌아온다 해도 나는 다시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피를 가득 뽑은 간호사가 돌아가고 나서였다. 내가 왜 이렇게 병원에 누워 있게 되었는지 떠올려보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도무지 떠오르는 게 없었다.


대신 그에 대한 기억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체어맨을 타고 나타난 그가 광고회사를 설립하고 나서 나를 데려가려고 꽤 공을 들였다. 솔직히 말하면 이미 나는 전성기를 지나 알게 모르게 퇴임 압박을 받고 있던 터여서 내심 그의 제안이 반가웠다.


광고밥 먹는 거 신물 난다.


나는 한동안 난색을 하면서 마치 광고계를 떠날 것처럼 떠벌였지만 실상은 적절시기를 엿보고 있었다.


야, 우리 중국 먹자. 앞으로 중국 먹는 자가 세계의 주인이 된다. 다들 알잖아.


향숙이가 중국이라는 엄청난 비전을 던져주면서 내가 회사를 그만두고 합류할 그럴듯한 명분을 만들어주었다. 


계를 쥐락펴락 해봐!


나는 월급이 아니라 원대한 꿈을 명분으로 앞세우고 그가 설립한 광고회사에 중견간부로 몸을 담게 되었다.


이어 대학시절부터 줄곧 내 애인이었던 향숙도 사표를 내고 합류를 했다.




그렇게 애를 써도 생각이 나지 않더니......


문득 내가 처음 독감으로 고생하던 순간이 떠올랐다.


나는 오한과 고열에 시달리면서도 아내에게 가슴을   만지게 해달라고 어리광을 피웠다. 가슴을 만지게 해 줘야 귤을 먹겠다고 말이다.


아내의 배려 덕분에 차도가 있는 듯 보였으나 실은 동네병원에서 처방해 준 약을 다 먹도록 독감이 낫질 않았다.


결국 나는 119 신세를 져가며 새벽녘 응급실에 입원을 하게 되었다. 벌써 두 주  전 일이었다.




신문 지면이나 팔아서 꾸려갈 생각이었던 그의 소박한 포부와 달리 회사는 몇 년 만에 광고업계의 기린아로 주목을 받을 만큼 급성장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그는 겉돌았다. 실제로 회사를 꾸려가는 사람은 그가 아니라 나와 향숙이었다.


하지만 벌어놓은 돈을 가져다 쓰는 사람은 그였다. 엄청난 이익을 내는데도 회사가 늘 자금난에 시달렸던 것도 그의 소비벽 때문이었다. 


그는 최고급 아파트에 살기 위해 엄청난 월세를 기꺼이 지불했다. 그리고 그 아파트에 걸맞은 외제차로 바꾸었다.


그가 사업을 핑계로 재벌이세들과 어울려 강남 유흥가에서 흥청망청 회삿돈을 써대는 줄도 모르고......  


나와 향숙은 중국 진출을 꿈꾸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에 매달렸다.


대한민국 최고가 되기는 어려워도 세계 최고의 광고회사가 되기는 쉬울 것 같았다. 급성장하는 중국 시장을 먹으면 된다, 그게 나와 향숙의 생각이었다.




여러 가지 검사결과 급성폐렴으로 진단이 내려졌다. 통상의 치료절차대로 매일 3차례 항생제가 투여되었다. 음식을 거의 먹지 못하자 24시간 영양제가 링거를 통해 공급되었다.


무엇보다 가장 견디기 힘든 건 무력감이었다. 거의 대부분의 시간 동안 산소 호흡기를 꽂은 채  잠만 잤다.


깨어나서 숨을 의도적으로 쉬어보면 폐에 매연이 가득 찬 듯했고 가슴이 찢기는 듯 아팠다.




그가 돌아온 탕자의 얼굴을 하고 며칠 사장실을 지키고  있을 때만 해도 우리의 앞을 가로막을 복병  같은 건 없을 줄 알았다.


우리는 회식을 하고 그리고 그의 호의에 이끌려 어느 산정호텔까지 가게 되었다. 


그에겐 매일  드나드는 놀이터나 다름없었지만 우리는 그저 사치스럽게만 여겨지는 낯선 곳이었다.


사실 그날은 우리 모두가 창립 이래 최고가의 광고를 따낸 기쁨에 취해 있었다. 내가 몸담았던 대기업조차 수주가 흔하지 않을 정도로 대형프로젝트였던 것이다.


그는 말할 것도 없고 나도 향숙도 들떠 있었다. 많이 마시기도 했지만 마치 대학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즐겁고 자유로운 기분을 느낀 것은 그날이 처음이었다.


우리는 비로소 우리가 원하는 세상으로 들어선 것 같았다. 상처 이전의 순수시대로...... 꿈만 꾸면 되는 시절로......




팔십 대 노인처럼 폐가 망가졌습니다.


뒤늦게 의사의 말이 와닿았다. 내가 살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세 명의 외삼촌들이 오십 대 중후반의 나이에 모두 폐렴으로 죽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건 아니었다. 몸이 아프고  무력감에 사로잡혀 있어서 저절로 찾아든 체념이었다.


물론 의사는 80퍼센트나 망가진 당신의 폐를 고쳐주겠다는 자신감이 넘쳐 보였다.




새벽까지 크게 웃고 떠들고 마시다 잠들었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그와 그녀가  바로 옆 침대에서 알몸으로 자고 있었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 피식 웃고 그만이었지만 어쨌든 그날 이후 그녀는 내 품에서 그의 품으로 옮겨갔고 내 옆자리에서 그의 옆자리로 옮겨 앉았다.


직원들의 수군거림이 들려왔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주말 아침 의사는 퇴원 결정을 내렸지만 나는 퇴원 당일까지도 줄곧 잠만 잤고 음식은 거의 입에 대지 못했다.


솔직히 나는 원할 때와 별다른 변화를 못 느꼈다. 하지만 의사의 결정에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항생제에 대한  의구심이 컸던 탓에 일단 병원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도 간절했다.


아, 저 항생제 계속 맞다간 죽을 것만 같다,는 생각을 줄곧 하고 있던 터여서 퇴원을 거부할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그날 이후에도 나는 새로운 광고를 따내서 회사에 갖다 바쳤고 기획과 매체광고, 인테리어사업부, 인쇄물, 심지어 광고간판제작까지 그가 벌여놓은 일들을 충실하게 밀어붙였다.


하지만 그는 갖가지 이유로 부채를 늘여갔고 심지어 우리 모르게 거액의 사채도 얻어 썼다.


너 이 새끼, 우리 엿 먹이려고 작정한 거지. 정신 안 차리면 내가 먼저 너를 처넣을 거야.


그가 마약을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 향숙은 멱살잡이까지 하며 그를 겁주었다. 그러나 나는 소용없는 일이란 걸 알고 있었다.




집에 와서도 계속 잠만 잤다. 일어나서 움직여보려 했지만 무력감을 이길 수 없어서 침대를 찾았고 침대에 누우면 잠을 잤다.


여전히 속이 메슥거려서 음식을 입에 댈 수도 없었다.


아내가 다시 병원에 가자고 했다. 하지만 무언가를 타고 움직이는 게 무서웠다. 죽을 것만 같은 데다 병원에 간다고 달라질 게 없을 것 같았다.


아내는 누워  있는 나에게 옷을 입히고 택시를 불렀다. 나는 정말이지 질질 끌려 나와 택시를 탔고 토하거나 기절하지 않고 무사히 병원에 도착했다.




일단 나가 있을게.


그가 검찰 소환장을 받고 내린 결정은 치명적이었다. 그에게 사태를 해결할 아무런 대책이 없다는 뜻도 되었다.


어쨌든 나는 그의 해외 도피를 만류했다. 하지만 그는 검찰 조사받는 것 자체를 두려워했다. 게다가 그는 교도소에 수감되는 것을 끔찍하게 여겼다. 


고문에 대한 기억과 군사정권 하에서 두 번씩이나 수감생활을  탓이 컸다.




의사는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응급실에서  검사를 받고 다시 입원한 나는 처음 입원할 때보다  더  아팠다.


몸은 쑤시고 오한 들린 듯 떨렸다. 속은 멀미하는 것처럼 메슥거렸다.


검사 결과도 마찬가지였다. 염증수치는 더 높아지고 폐는 더 나빠지고.......


그러니까 일주일간의 항생제 투여로 내가 얻은 것은 악화였다.


의사로서도 그것이 내심 절망스러운 듯 보였다. 나는 그의 얼굴에 스치는 어두운 그림자를 보았다.


비로소 그는 내가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듯 느꼈다.




지금은 정권타도를 외치다 잡혀가는 게 아니잖아. 기껏해야 경제사범이야. 불구속 상태로 재판을 받을 수도 있고, 합의를 보면 실형을 안 살 수도 있어. 집행유예를 받을 수도 있다고.


나는 내가 알아본 그대로 전해주고 설득했지만 그는 검찰 출석일 이틀을 앞두고 필리핀으로 출국해 버렸다.


나와 향숙에게 모든 것을 떠넘기고 무책임하게.....




새로운  항생제가 처방되었지만 염증수치는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다행히 멀미하듯 울렁거리던 속은 몇 번의 주사약 투여로 차츰 안정을 되찾았다.


하지만 여전히 음식을 먹을 수 없었고 무력감은 계속되었다. 다시 입원해서도 링거로 영양제를 공급받으며  잠만 잤다. 


이틀 내내....... 죽은 듯이.......


어쩌면 나는 그의 처형을, 처형의 시간을 온몸으로 겪는 중이었을지  몰랐다.




그는 나와의 마지막 통화에서도 역시 도피자금을 요구했다. 그리고 70년대의 대한민국을 운운하며 중국에서의 자신의 생활이 얼마나 비참한지 설득하려 했다.


나는 그에게 해외로 도피하면 공소시효가 중단된다는 것을 일깨워주었다. 그리고 차라리 한국에  돌아와 재판받는 게 희망적이니 자수하는 게 어떻겠냐고 회유했다.


하지만 그는 자기가 나한테 남겨주고 온 돈이 얼만데, 그걸 해결해주지 못하고 자기를 몇 년째 범죄자로 도피생활 하게 만드느냐는 정말 어처구니없는 비약에다 씨발, 개새끼.라는 말까지 서슴지 않고 쏟아내더니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나는 의사에 대한 불신을 감춘 채 회진 때마다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다.


사실 조금만 기운이 돌아오다른 병원으로 옮길 생각이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두려움  때문에 섣불리 입 밖으로 내비치지는 못했다.


더구나 엄습하는 무력감을 떨쳐내고 걸어 나갈 자신이 없었다.



나는 그녀가 그에게로 가고 싶어 한다는 걸 알아챘어야 했다.


하지만 어리석었던 나는 그녀가 회삿돈 수천만 원을 빼돌려 중국으로 가버릴  때까지만 해도 아직 그녀를 믿고 있었다.  그녀는 어쩔 수 없었던 거라고.


그녀는 나의 완벽에 가까운 실행하고 처리하는 능력만큼이나 그의 결단력과 리더십을 좋아했다.


그렇다고 해도 끝내 중국으로 가버린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는 나를 필요로 했어. 너는 내가 없어도 되잖아.


나는 어렴풋이나마 기억나는 그녀의 말을 되씹어보지만 그것은 해답이 될 수 없었다.


하긴 어느 인생인들 해답이 있을까.




다시 입원한 뒤로 나는 새벽마다 허걱소리를 내며 깨어나곤 했다.


물속에 머리를 처박았다가 빼내는 순간 급하게 숨을 몰아쉬면 폐로 물이 따라 들어와서 컥하고 토하게 되는 것처럼.


생명이 무참히 짓밟히는 순간이었지만 고작 할 수 있는 말은 살려주세요, 잘못했습니다, 따위의 참회 어린 외침이었다.


나는 어둠 속에서 소리 없이 울었다. 아니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렸다.


어쩌면 우는 것은 내가 아니라 불꽃같던 청춘의 어느 날인지 몰랐다.




처음엔 그녀를 원망하기도 했지만 나중엔  낡고 슬프고 더러운 감정만 남은 상태가 되었다.


그녀가 중국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혹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아는 것은 없다.


아주 가끔 그녀에게 전화가 오면 받았고 그의 소식을 전해 들었을 뿐이었다.


이제 걱정 안 해도 돼. 완벽하게 신분세탁도 했고 새로  시작한 사업도 잘되고 있어.  빌딩을 살지도 몰라.


십여 년 전, 그러니까 그가 중국공안당국에 붙잡히기 직전에 그녀가 전해준 소식은 다분히 짜증 나는 것이었다.


하지만 불과 일이 년 뒤 그녀는 그가 필로폰을 소지하고 있다가 중국공안당국에 붙잡혔다는 희소식을 전해주었다.


즐겁기까지 했다고 말하면 좀 더럽게 들리겠지만 어쩐지 나는 그런 기분이 들었고 뒤늦게 복수를 한 것처럼 어떤 통쾌함도 맛보았다.




다시 입원한 지 사흘째 되는 날 나는 꿈을 꾸고 있었다. 비록 어둡고 슬픈 배경뿐인 꿈이었지만.


생각해 보니 두 주 내내 잠을 자면서도 꿈을 꾼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저 완전한 무력감에 로잡혀 있었을 뿐.


식욕이 돌아왔어.


나는 아침에 죽을 몇 수저 뜨고 희미하게 웃기까지 했다.


다행이다.


아내가 눈물을 쏟으며 웃었다.




그날 이후로 매일 꿈을 꾸었다. 혼자 외롭게 어둠 속을 떠도는 꿈이었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던 것 같다. 전환이 되고 있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오늘 아침엔 어둠 속에서 어둠을 게걸스럽게 마구 뜯어먹는 꿈을 꾸었다.


그 꿈  덕인지 밥으로 바꿔 나온 아침을 절반이나 먹었다.


기운이 나네. 혹시 당신 향숙이 전화번호 장해 둔 거 있어!


응, 향숙이?


왜 있잖아. 나한테 회사 떠넘기고 중국으로 도피한 내 친구 애인..,..


회사는 무슨 빚만 잔뜩 떠넘기고 간 거지. 근데 향숙이는 왜?  자기가 지웠잖아. 몇 해 전에.....


당신한테 혹시 저장해 놓은 거 있나 싶어서......


미쳤어! 내가 왜 그 또라이 번호를 저장해 둬.


아내는 불쾌한 내색을 감추지 않고 수저를 내려놓았다.


살만한가 보네. 그만 먹을 거지!


식판을 내놓으려고  일어서면서 아내는 곱지 않은 눈으로 나를 쏘아봤다.




오늘 퇴원하셔야죠. 염증수치는 거의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스레이는 추후 더 관찰해 봐야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전에 폐렴 앓은 적 있다고 하셨나요. 아니 없다고 하셨지. 담배도 안 피우시고...... 폐가 워낙 안 좋으십니다. 다음 주에 외래에서 뵙지요.


한 무리의 의료진을 몰고 온 의사는 모처럼 싱긋  웃어 보였다.


혹시...


의사는 되돌아서려다 말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렸을 때 물에 빠진 적 있으십니까?


아뇨.


왜 그렇게 폐가 쁘지.....


의사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병실을 나갔다.


                        끝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실은 아직 퇴원 수속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모두들 건강조심하시고요.


언제나 변함없이 행복하시길 바랄게요.


또 뵐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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