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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세벽 Jul 23. 2023

월화 4-1. 수미의 전화

어느 여름 해변에서 만난 소나기처럼

아버지의 폭력과 할머니의 신경질을 견디지 못한 엄마가 집을 나간  뒤였다. 아버지와 할머니는 나한테 분풀이를 하기 시작.


어린 나로서는 견디기 힘든 학대였다. 하지만 나는 엄마에게 다시는 집으로 돌아오지  말라고 쉴 새 없이 텔레파시를 전송했다.


'엄마, 절대로 집에 오지 마. 내가 크면 엄마 찾아갈 거니까  그때 보자.'


어린아이가 감당하기엔 벅찬 쓸쓸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쩌다 내가 웃으면 비련의 주인공을 흉내 내는 것 같다며 시기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야속하고 당혹스러운 시샘이었다.  


엄마 없는 아픔을 잇사이로 깨물고 웃으면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고  변명하지 않았다. 대신 나는 그 아이들 앞에서 다시는 웃지 않는 것으로 복수를 했다.




비련의 여주인공은 아르바이트를 두세 개씩 하면서 겨우 여고졸업했지만 대학엔 들어갈 수 없었다. 장학금을 받을 만큼 공부를 잘하지도 못했고 아르바이트를 열심히 한다고 해서 대학에 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대학생이 되어 엄마를 만나겠다는 꿈은 진작 접어야 했지만 졸업할 무렵엔 어떻게든 먹고살 자신이 생겼다.


오랫동안 아르바이트를 전전해온 나는 졸업도 하기 전에 비비안이라는 속옷 가게의 정식 점원으로 취직이 되어 친구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사장이 나를 갖고 싶어서 온갖 선물 공세를 펼치는 것만 빼면 그리 나쁘지 않은 직장이었다고 나는 기억한다.


사장이 울면서 사랑을 고백했을 때 나는 약간 흔들렸다. 그가 애 딸린 유부남만 아니었다면 나는 기꺼이 사장을 받아들였을지 몰랐다.


나는 수컷의 욕정을 적당히 이용해서 고급 일식집과 레스토랑을 드나들고 값비싼 옷과 신발을 마음껏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많이 받을수록 사장을 미워했다.


게다가 내 꿈은 휘황찬란한 조명으로 꾸며진 비비안점원이 아니었다. 내가 어머니를 만나서 보여주고 싶은 모습은........ 대학생이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공무원이었다. 그리운 엄마를 공무원이 되어 만나도 괜찮을 것 같았다.




밤잠을 줄여 가며 공부했는데도 공무원이 되는데 3년 여가 걸렸다.


학교 다닐 때 공부를 썩 잘한 것도 아닌 내가 공무원시험에 합격하고 나니까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다.


그러나 말단 공무원이 되었다고 해서 내 인생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여전히 가난했고 쓸쓸했다.

   



공무원이 된 지 몇 해가 지나도록 이런저런 공무를 핑계로 엄마 찾는 걸 미뤄오다 마침내 나는 어렵지 않게 엄마를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후회가 됐다. 재래시장 통닭집에 딸린 쪽방에서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는 남자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는 공무원이고 이제 마음만 먹으면 비련의 여주인공에서 비련이 사라진 여주인공으로 살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동사무소까지 찾아와 손을 벌리는 지겨운 아버지와 할머니처럼 엄마도 내 인생에 걸림돌이 될 것 같은 불길함을 떨칠 수 없었다.


하지만 엄마에 대한 그리움을 버릴 수 없던 나는 주말이면 종종 버스를 타고 먼 도시의 재래시장을 다녀오는 모험을 감행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의 남자가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소릴 들었다. 엄마의 고향 오빠였다는 것도 알았지만 나는 그 남자의 사기꾼 같은 눈빛이 싫었다고 솔직히 말해버렸다. 


마치 그 남자 때문에 몹시 불편했던 것처럼 말하고 나니까 그간 엄마를 냉대한 데 대한 해명이 된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엄마를 찾은 지 일 년이 조금 지난 뒤였다.


내 인생의 걸림돌이 될까 봐 걱정하는 내 마음을 읽었던 것일까 엄마는 제초제를 마시고 떠나버렸다.


나는 울지 않았다. 엄마가 나를 너무 오랫동안 슬픔 속에 버려두었다는 생각으로 울음을 삼켰다.


죽은 엄마가 폐암말기였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도 나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는 그만이었다.


내가 알았다고 해도 발길을 끊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나를 오랫동안 비련의 여주인공으로 살게 한 것에 비하면 턱도 없지만 엄마는 얼마간의 유산을 남겼다.


엄마는 나를 위해 안 먹고 안 쓰고 모은 거라고 유서에 밝혔지만 실은 죽기로 결심한 뒤에 든 생각일 수 있었다.


이상하게도 엄마가 떠난 세상은 더없이 홀가분했다.


  


4.


월화와 인화가 택시를 불러 타고 어디론가 떠나가버리고 사찰집사도 허우적허우적 뒷산으로 올라갔다.


나는 월화가 내 옷을 어디 두었는지 찾아보려고 사택을 기웃거렸다.  하지만 주인도 없는 집에 들어가 옷을 가지고 나올 수는 없었다.


- 에이, 저리 가.


내가 월화의 허벅지를 거슬러 오르며 핥고 있을 때였다. 그 아이는 앙증맞은 발로 내 가슴팍을 차버렸다. 하지만 나는 침대  밑으로 굴러 떨어지면서도 모멸감을 느끼기는커녕 즐거웠다.


- 안 자?


월화는 깔깔깔 웃고 나서 내게 물었다.


- 자야지.


나는 엉거주춤 일어서서 바보처럼 웅얼거렸다. 침대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월화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 아이의 평안을 방해한 대가로 혼이 나고 있는 쑥스런 기분이었다.


- 나는 갈 테니까 잠 좀 자.  안 자면 우리 아버지처럼 미쳐. 하하하.... 눈깔이 뒤집어지면서 꽈당 자빠져서 거품 물고 파닥파닥.....


월화는 침대에서 내려와  옷을 입은 채로 나가려다 생각난 듯 돌아봤다.


- 주말 지나서 올 거야.


문을 닫기 전에 월화가 남긴 말이었다. 그 아이는 내 옷을 입고 집으로 가버렸다.


나는 월화의 아버지에게 간질이 있다는 걸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자식들에게 그런 모습을 보이기 싫어 산속에 들어가 살고 있는 거라고 말이다.


나중에 안 거지만 그녀들은 주말에는 집을 나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사찰집사도 일찌감치 산에 올라거서 저녁 늦게 돌아왔다. 남편을 만나고 오는 건지 는 알 길이 없었으나 나도 묻지 않았다.


어쨌든 사찰집사 가족은 마을 사람들을 만나는 걸 끔찍이 싫어해서  피해버리는 것이었다.


나는 옷 찾는 건 안중에도 없이 주말이 더없이 길어질 것 같은 예감을 안고 선교관으로 발길을 돌렸다.





수미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는 잠시 휴대전화 액정을 들여다보고 있다가 전화를 받았다.


- 지낼 만 해?


수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정하게 물었다. 그녀는 내가 먼저 전화라도 해주길 바랐을지 몰랐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내가 너무 뻔하게 느껴져서 그만두었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 응, 불편한 건 없어.


도착하자마자 전화하려다 그만뒀어,라는 말이 입가에 맴돌았다. 하지만 그 말 마저 삼켜버렸다.


- 조만간 갈게. 뭐 필요한 거 있으면 문자 남겨. 그리고 자기 아버님께는 내가 잘 말씀드렸으니까 걱정 말고.


-.,......


- 우리 아버지가 자기 승진시키려고 이사회 열릴 때까지만 가 있으라 했다고 말씀드리니까 좋아하셨어.


-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런.....


- 둘러대려고 꾸민 이야기가 아니고...... 아버지가 말하지 말라 했는데..... 그러잖아도 결혼식 전에 자기를 중역으로 승진시킬  생각이었데. 그러니까 걱정 말고 밥 잘 챙겨 먹어. 여기 일은 잠시 잊고.....


수미는 아쉬움과 애정이 듬뿍 담긴 목소리로 몇 번이고 위로의 말을 건넸다. 나는 금방이라도 참회의 눈물을 쏟을 것 같아 입술을 깨물고 견뎠다.


- 사랑해.


전화를 끊기 전 수미의 애틋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하마터면 울음을 터트릴  뻔했다. 어쩌면 단말마처럼 터져 나온 신음 소릴 수미가 들었을지 몰랐다. 하자만 수미는 모른 척 전화를 먼저 끊었다. 수미가 전화를  끊고 울고 있을 것만 같아 마음이 아팠다.


사실은 나도 아주 잠깐 흐느껴 울었었다. 아무런 대가 없이 용서받은 자만이 흘릴 수 있는 감격 어린 눈물이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사택으로 갔다. 그리고 마치 수색할 권한을 지닌 것처럼 월화와 인화가 자는 방 문을 열어젖혔다.  나는 타락의 소굴 어딘가에 있을 내 옷을 한시라도 빨리 찾아오고 싶었다


그 아이들 방이 어수선하긴 했다. 하지만 평범한 방이었기 때문에 나는 알 수 없는 친근감을 잠시  받았다. 방안을 살펴봤지만 내 옷이 없다는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렇다고 옷을 넣어둘 만한 가구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안방엔 오래된 자개농이  놓여 있었다. 미친 사람들이 사는 방이 아니었다. 그냥 여느 집과 다름없는 방이었다. 나는 뭔가 불길한 예감에 사로 잡혀 뒤를 한 번 돌아보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장롱문을 차례로 열어젖혔다. 하지만 내 옷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그제야 욕실  세탁기를 떠올렸다. 내 생각엔 세탁된 깨끗한 옷이었지만 월화 입장에선 빨아서 돌려주려고 세탁기 안에 집어넣었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사실 그 옷은 손세탁하거나 세탁소에 맡겨야 했다.


나는 욕실  세탁기를 살펴보기 위해 안방에서 나왔다. 그런데 하필 청년회장이 사택  앞을 지나가다가 나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다.


안방으로 다시 뛰어들어가 몸을 숨기기에는 너무 늦어버렸기 때문에 나는 얼떨결에 청년회 회장에게 꾸벅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머릿속은 하앴다.


                                                 이어서 계속


늘 읽어주시는 작가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작가님들 건강조심하시고요. 언제나 행복하시길 바랄게요. 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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